오늘의 말씀

진리는 너희에게 자유를 얻게 할 것이다

거듭난 삶 2019. 7. 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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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자유

 

요한복음 8 32

'너희가 진리를 알리라. 진리는 너희에게 자유를 얻게 것이다'(요한복음 8:32, 일본어역)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깊은 말씀인데,

요한복음 8장의 말씀 같은 것은 특히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진리, 안다, 자유,

모두가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것을 1절같이 연결시켜, 의미는 일층 심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지식에 적용하여, 그것이 진리임은 명료하다.

 

수학문제를 해결하렴에 있어서, 진리에 맞는 해답을 얻는 ,

학생은 그것에 관하여 절대적 자유 위에 서는 것이다.

 

그때, 교사도 교과서도 옳다,

우주 무엇도, 그의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

 

실로 '너희가 진리를 알리라. 그리고 진리는 너희에게 자유를 얻게 하리라'이다.

 

나의 학생시대의 경험에 있어서,

유명한 가노의 물리학서 가운데, 어떤 대수학상의 공식(formula) 관하여,

문자의 오식이 있었던 일이 있다(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를 가르친 외국교사 모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등생이 교과서 그대로를 암기한 , 교사는 이것을 칭찬하여 그에게 만점을 주었다.

 

그런데 학생은 이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교사에게 배척받던 학생이어서, 교사는 학생의 불법을 책했다.

 

그러나 학생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학생은 교과서 그것에 잘못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순순히 그의 설명을 시도했다.

 

그는 진리를 파악했기 때문에 교사도 교과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옳고 교사와 교과서가 잘못된 것을 증명했다.

 

그러자 교사는 그와 학급생 앞에서 낯을 붉히며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을 없었다. 그리고 ,

소위 우등생도 그가 이미 얻은 만점을 빼앗기고 영점을 맞기에 이르렀다.

 

'진리는 너희에게 자유를 얻게 하리라'이다.

 

진리 있는 곳에 우리를 지배할 권위는 없다.

자유는 실로 진리의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학문진보의 역사에 있어서 같은 일이 번이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설을 말한 ,

갈릴레오(-8 77참조) 지구 회전 설을 유지한 ,

젠너가 당시에 영국 의학계 전체의 반대를 받으면서 종두의 유효함을 주장한 ,

이것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진리이다.

진리는 교권 또는 정권보다도,

사회의 세론보다도, 정연한 의논보다도 강한 있다.

 

깊은 고요한 우주의 진리, 이것을 파악할 ,

사람은 실로 세계의 (king)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에 비하여,

정치 또는 사회운동에 의해 얻은 자유,

천재 또는 다수의 갈채에 의해 얻은 자유는,

가치가 아주 하찮은 것이다.

 

학문의 귀함은 때문이다.

진리에 달하여 참으로 자유이기를 바라는데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구히 인류의 존경을 이끌어 마지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에 달하여 자유이기를 바라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한 진리이다. 그리고 귀한 자유이다.

 

예수의 말씀은 물론 학문의 진리에 해당시킬 수가 있다.

 

미국 존스 홉킨즈대학(Johns Hopkins-) 대강당 입구의 -(arch)

예수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 것은 실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은 철학자 또는 과학자를 지도하기 위해 발해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찾아 구하려 자에 대해 발해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플라톤이라든가 아리스토텔레스 ,

그리스적 학자의 입장에 서서 해석할 것은 아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 유대적 신앙가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여 깨달아야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또는 '안다' 하여,

오늘의 학자라든가 학생이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말은 아니다.

 

'자유'라고 하여,

오늘의 정치가, 법률가, 사상가, 사회개조가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들은 예수의 귀한 말씀을 알고자

신약성서 전체의 입장에 서서 의미를 찾지 않으면 된다.

'진리' 역된 그리스어 'aletheia' 의미는

진리라기보다는 도리어 실체이다.

 

사물에는 그림자와 (substance) 있다.

그림자는 변하는 , 또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실체는 영구히 변치 않고 남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나 그림자를 쫒아가며 실은 구하지 않는 자이다.

우상은 모두 그림자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우상을 불러 '헛된 '(허무한 )이라고 했다.

 

이에 반하여 참되신 하나님은,

참으로 계신 (있는 ),

유일의 실재자,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있고 있는 )이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진리를 것이다'라는 뿐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물론 진리의 근원이신데, 그러나 수학적 진리같이 비인격 진리는 아니다.

 

하나님은 실체이시다. 그리고 실체에 접하여 참된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다'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안다' 것은, 독서, 사고, 사색의 결과로서 안다는 것은 아니다.

 

성서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안다' 것은 의미 깊은 말이다.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을 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됨을 '하나님께 알려졌다' 한다.

 

우리 일본인에게 있어서도 '사람은 자기를 아는 위해 죽는다' 하는 경우에,

'안다' 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은 아니다.

'안다' 것은 깊이 인격에 접촉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적 지식이라 칭할 , 얼마쯤 의미를 통할 수가 있다.

 

안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는 의기상통 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있어서는,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방기하고서 하나님의 의지로서 자기 의지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안다' 것은,

학문의 일이 아닌, 신앙의 일이다.

두뇌(head) 일이 아닌, 마음(heart) 일이다.

 

학자가 학구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알아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여기서의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과,

 

데살로니가전서 1 9절에 있어서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 계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라' 있는 것과,

의미에 있어서 다를 없는 것이다.

 

우상, 그림자, 공허, , 공상, 자아, 정권, 금권, 아닌 만물

이러한 모든 것을 버리고,

실재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 이를 하나님으로서 섬기는 ,

그것이 요한복음이 여기서 말하는 '진리를 안다'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자유' 주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란, 정치상 또는 사상상의 자유는 아니다.

근대인이 상찬하여 마지않는 연애 실행의 자유가 아닌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는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이를 실행 있는 자유이다.

 

예수 자신이 설명을 주시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의 노예이다.

노예는 언제나 집에 있지 못한다. 아들은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만약 너희에게 자유를 주면 너희는 실로 자유를 얻을 것이다'(8;34-36).


악인 알면서 악을 행한다.

이것은 악의 노예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모두 가련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의 노예도 아니지만 죄의 노예이다.

욕의 노예이다. 정의 노예이다. 교만(고만) 노예이다.

하찮은 사상의 노예이다. 편견의 노예이다. 자가전문의 노예이다.

 

이런데 반대하여 그는 선인 알아도 선을 행할 수가 없다.

훌륭한 신사, 훌륭한 학자, 때로는 훌륭한 신앙가라도,

결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상의 자유로서 자랑하는 사상가,

때로는 지극히 하찮은 것의 노예로 되어 몸을 끝장내는 경우가 적지 않음이,

이것을 증거하고도 남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그러한 노예는 '언제나 집에 있지 못한다' 한다.

자유의 하나님의 가정에 있지 못하고, 자유의 생애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 독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 중에 계신다.

악은 반드시 이를 물리치시고, 선은 반드시 이를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시는 곳에 참된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가, 인간이 추구해야 지상선이 아닌가?

 

악을 미워하여 이를 물리치는 자유,

선을 사랑하여 이와 친근히 하는 자유,

이것은 실로 최상최대의 은사인 것으로서,

인생의 수확물로서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철학자 칸트(-7 141역주) 힘주어 번이고 말한다.

 

'우주최대의 것은 선한 의지이다'라고.

 

선한 의지와 이것을 행함의 능력,

이것만 얻으면, 인생은 사실 아무것도 얻지 못한대도 목적을 달한 것이다.

 

'너희가 참을 알리라. 참은 너희에게 자유를 얻게 것이다'라고.

 

너희가 만물의 실체인 참된 하나님과 부자주종의 깊은 관계에 들어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계는 너희로 하여금 죄의 속박에서 면하게(피하게)하고,

악을 피하여 선을 행하는데 자유케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실로 위대한 선언이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고서는 발할 없는 선언이다.

그러면서도 이는 공막한 과대의 선언 아니다.

 

사실로 나타난, 그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선언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실로 자유를 주신다.

악을 미워하고 선과 친근히 하는 마음을 주신다.

죄의 세상에 있어서 선을 실행하는 최대의 세력은 지금도 옛과 다름없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뿐이다.

 

철학도 논리도, 어떠한 사상도 문학도, 죄를 근본에 있어서 깨끗이 함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나병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말하기를, 주께서 마음에 합하시면 나를 깨끗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펴서 그에게 손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합하다. 깨끗해져라.

나병이 깨끗해졌다'(마태복음 8;2-3) 있다.

 

기적을 실험한 사람은 나병자에 한하지 않는다.

후세 허다한 크리스천이 문자대로 이것을 실험했다.

예수는 없으신 이시다. 그러므로 죄를 제거하실 수가 있다.

 

어떻게 하여 하나님을 있을까? 길은 다만 하나 있다.

 

'영원한 생명이란 이것이다. 다만 참되신 하나님인 그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라'(요한복음 17;3) 있는 대로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서만 수가 있다.

 

실로

 

예수는 길이시다.

이시다.

생명이시다.

사람은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 아버지 있는 곳에 없고

예수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14;6-7).

 

예수 자신이 실체이시다.

그리고 그를 참된 자유가 있다.

 

우리들은 그의 지체로 되어,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받고,

우리들의 죄에 이겨, 욕과 정을 정복할 있어,

참된 자유의 사람으로 수가 있다.

 

그리고 자유 있을 ,

필연의 결과로서 다른 자유가 있는 것이다.

 

먼저 영혼의 자유가 있고, 다음에 사상과 신체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깊고 깊은, 그러나 누구나가 해득할 있는 진리이다.

 

'희가 진리를 알리라. (진리) 너희에게 자유를 얻게 것이라'.

 

모든 건전한 개혁은 근원을 여기서 발하지 않으면 된다.

 

*내촌감삼의 글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