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거듭난 삶 2019. 7. 2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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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시다

 

: [ 9:1-12] 예수께서 가실 때에 때부터 소경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사람이 소경으로 것이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때는 아무도 일할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9:1-2] 예수께서 가실 때에 때부터 소경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사람이 소경으로 것이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부모오니이까 -

 

나면서 소경 자를 고치신 것은, 창조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없다.

 

제자들의 물어본 ,

 

, "랍비여 사람이 소경으로 것이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부모오니이까" 라고 것은, 생각할 만하다.

 

때부터 소경된 자가 무슨 죄를 지었겠기에 "자기오니이까"(자기 때문입니까)라고 하였을까?

 

이것은, 유대인 랍비들의 그릇된 교훈대로, 사람이 나기 전에 영혼이 벌써 있었다는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어쨌든 이런 말은 진리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납득되실 없는 그릇된 말을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성경상으로 보아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지 않는 불행이나 고통도 있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답변에서 그런 의미를 밝히신다.

 

 

 

[ 9: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때는 아무도 일할 없느니라 -

 

3 말씀은, 마치 나면서 소경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불행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여기 ""이란 말의 헬라 원어 "일들"이란 뜻이다.

 

"일들",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것도 하나님의 ) 나타났고,

(2)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일로도 나타났다.

 

""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세상에 계실 때에 국한하여 하셔야 일들이 별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의미의 사명 실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없는 때가 아셨다.

 

사람들이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번만 문을 두드린다".

(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 9:5-7]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예수님께서 이제 빛을 소유하지 못한 소경에게 눈을 밝히는 권능을 행하시기 위하여, 먼저 자기가 누구이심을 알려 주신다.

 

여기 그의 알리는 말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하신 것은,

 

영적 의미를 가진 넓은 범위에 속한다.

그는 소경을 고치시는 빛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소경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영생의 빛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이신 것을 먼저 알려 주신다.

 

실상 소경은, 자기의 눈이 밝아지기를 원함보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에게도 예수님을 바로 아는 참된 지식이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명백히 알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뜨는 것보다도 귀한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은, 혹설에 의학적 치료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실상 침은 안질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그런 자연적 치료에 의하여 소경의 눈을 밝히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셔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1) 그가 어떤 피조물을 가지시고라도 능력을 행하실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

(2) 진흙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비유하고, 침은 그의 말씀의 신성을 비유한다고 .

(3) 하나님 아버지께서 처음에 사람을 지으실 때에 흙으로 하신 같이,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의미라고 . 그러나

(4) 이것은, 소경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 소경은 본래 보지 못하여 매우 갑갑함을 느끼는데,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갑갑함을 느끼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명령을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그것을 씻었다.

 

이는 마치,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가서 일곱 몸을 잠그게 하여, 그의 문둥병이 고침 받도록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하 5:10-14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씻으라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몸을 잠그니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 히브리 원어 쉴로아크 말과 같다. 말은, 사도 요한이 해명한 것과 같이 "보냄을 받았다"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소경을 실로암 못에 보내신 목적은,

소경의 눈을 예수님 자신이 고쳐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을 관설하신 것은, 실상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를 반영시킴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교는 요란스러운 폭력이나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 의하여 고요히 진리로 역사한다.

 

(왕상 19:12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사야도 말하기를

 

, "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니 그러므로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하수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하였다.( 8:5-8).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실로암 물로 상징된 여호와의 종교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불신앙으로 논란하였으니, 그것이 14-34절에 기록되어 있다.

 

(14-3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어떻게 보게 것을 물으니 가로되 사람이 진흙을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사람이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것을 믿지 아니하고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사람이 죄인인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저희가 가로되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사람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여호와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었으며, 실로암 물로 상징되었다.

 

"실로암 "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안에 있다. 그것은 히스기야왕이 전쟁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팠던 것이다.

 

 

 

[ 9:8-9] 이웃 사람들과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칼빈(Calvin)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

 

" 소경이 이웃 사람에게만 알려졌던 것이 아니라 지방 모든 거민들에게도 걸인(乞人)으로 알려졌던 것이 확실하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소경이 이제 눈을 떴으니, 이적은 의심할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도 변론하면서 이적을 유쾌하게 믿지 아니하려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명백하게 나타나도 인간성은 거기에 대하여 희박하게(혹은 적게) 믿는 악한 근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건에 있어서 그들의 의심은, 이적을 사실로 드러내는데 도움이 뿐이다. 이유는, 그들이 소경에게 힐문할수록 그의 증언은 더욱 확실히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진리는 모든 반대와 시험을 겪을수록 더욱 빛난다"라고 하였다.

(Calvin's Commentary,John's Gospel, P.372).


"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이것은, 소경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증거한 일보(第一步)이다.

 

그는, 소경으로서 눈을 뜨게 은혜를 받고,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자기(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고자 하심이다.

 

(1)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가 사실을 증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게 계속될 없다.

(2)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은혜 받은 사실을 증거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폐단도 있다.

이것이 역시 증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근심되게 하는 행동이 되어진다.

 

그러나 소경은 최후까지 주님을 나타냈다.

 

"내가 그로라" 말도 자신을 자랑하는 의미가 아니고, 소경 되었던 자기 처지를 밝혀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 9:10-12] 저희가 묻되 그러면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고침 받은 소경은, 여기서

 

(1) 자기의 신념 그대로를 발표한다.

, 그는 자기의 개인적 체험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

이것은, 그의 순수한 확신을 남들에게 알게 하여 주는 고백이다.

 

(2)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순종의 열매가 얼마나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하였으니,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틀림없이 효과를 가져왔다는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