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거듭난 삶 2019. 9. 2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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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자신을 위한 간구

[하나님 아들의 중보 기도]

 

 

: [ 17:1-5]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17: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하시고 -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告別) 설교는 끝이 났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머리를 돌리신다.

 

' 말씀' 13-16 사이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를 지시하며 보다 가깝게는 16:33 나타난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선언을 가리킨다.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눈을 들어 - 요한은 예수의 몸동작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나 예물을 드릴 취했던 전형적인 자세였으며

 

(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33:25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피있는 고기를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4:34 기한이 차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또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다. (L. Morris).

 

예수는 11:41에서도 이런 자세로 기도하셨는데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는 공간적인 개념에서의 '위쪽'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에서의 위쪽을 가리키며 결국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아버지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르' 14:36에서와 같이 아람어 '아바' 전제로 말이다. (G. Dalman).

 

(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람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부를 사용하는 용어로서 우리말 '아빠'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장에서 예수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데,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1 나는 세상에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1 아버지께서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알았삽나이다)

 

이는 예수와 하나님의 지극히 친밀하고도 유기적(有機的) 관계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되심을 시사하는 말이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 '' 대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의 때를 가리킨다.

 

( 14:41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대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예수께 손을 대지 못했다.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8:20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예수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8:50 나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께서 스스로 구하는 영광 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 (L. Morris).

 

한편 '영광'(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낼 반복 사용되었다.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것인 생각났더라)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성부의 영광에 고정(固定)되어 있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들에게 주신 모든 -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에도 나오는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제자를 가리킨다. (C.K. Barrett).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15:1-10) 고별 설교에서 다시 설명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해당하는 헬라어 '' 하나의 공동체 '전체'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 의미한다는 견해. (Barnard)

 

''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 8:28)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본다.

 

예수는 6:39에서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만민'과도 구분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내게로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65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만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 만민은 '모든 육체',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Lenski).

 

이들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 (L. Morris).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3:35-3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시며

 

(5: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있는 원동력이다.

 

(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편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 17: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 (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깨닫는 것이다'( 9:24) 했다.

 

'안다'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거한다. (Lenski).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 되신다.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일에 증인이로라)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는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 예수는 아직 그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수하였노라고 고백하신다.

 

예수께서 땅에 오심 자체가 이미 승리를 보증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말씀은 타당하다. 이는 시간적인 성취의 의미보다는 실패할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는 차원의 의미에서 이해된다.

 

'' 지상 생애 동안 예수가 행하신 모든 교훈과 사역이며

그것은 인간을 '심판하는 ' '생명을 주는 ' 요약된다. (H.R. Reynolds).

 

한편 예수께서 그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아버지' '보내신 ' 또는 '일을 맡겨 주신 ' 등장한다.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손에 주셨으니;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나의 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상의 질서를 나타냄과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동시에 강조한다.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한편 '이루어'(텔레이오사스) 뒤에 나오는 ' 이루었다'(19:30)라는 선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에 번도 주저하는 일이 없으신 예수는 그의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본서의 기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예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기록했으며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본절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차례 사용하였는데,

이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선재성(先在性) 강조하는 동시에 지금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음을 시사한다.

 

첫번째 '함께'라는 말은 성육신 이전 상태로서의 하늘 영광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이며(Lenski)

 

두번째 '함께'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얻게 영광을 지시한다.

 

세상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계셨던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아들의 신성과 영광은 성육신을 통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 비하(卑下)되었다.

그는 하늘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서 완전한 인성으로 땅에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