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거듭난 삶 2019. 10. 5.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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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신 예수

[하나님 아들의 수난]

 

: [ 18:1-9]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18: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 여기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수의 기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장은 예수의 중보기도(17)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 있는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노출시키지 않고 대신 17장의 기도문에 나타난 예수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 예수가 기도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의 방향으로 언급되는 기드론 골짜기를 말한다.

 

'시내' 번역된 '케이마르로스'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기드론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

 

(왕상 15:13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 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

 

(삼하 15:23 사람이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거기 동산이 있는데 - 기드론 시내 건너쪽에 있는 동산이라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 '동산'(케포스)이라는 말은 요한만이 언급한다.

 

마태와 마가는 '겟세마네'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 '장소', '' 의미하는 '코리온' 것으로 보아서 '정원'(garden) 의미하는 본절의 '동산' 의미상 별다른 차이가 없다.

 

'들어가다' 말이나 4절의 '나아가'라는 말로 보아서 이곳에 어떤 울타리가 있음을 암시하므로 '케포스' '코리온' '정원' 또는 '제한된 장소' 이해할 있다.(C.K. Barrentt)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장소를 가룟 유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 또는 '농원' 지칭한다.

 

그의 제자들 - 저자는 제자들을 복수로 언급할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점은 공관복음서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여 명의 제자를 강조하고 구별한 것과 대조된다.

 

 

 

[ 18:2]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곳을 알더라

 

가끔 모이시는 - 요한은 예수와 제자들이 동산을 처음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여러 차례 방문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따로 떨어진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올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 여러 방문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18: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군대와 -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사람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14:34 말씀하시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22:47 말씀하실 때에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유다가 이끌고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오클로스)라고만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스페이라)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부대 단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C.k>Barrentt).

 

그런데 혹자는 '스페이라' 안토니아 성에 주둔해 있던 작은 부대로 추측한다(Robertson, Lenski).

 

그러나 12절에서 지휘관으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작은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을 동행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하속들) - 공관복음서와 같이 요한도 역시 예수를 죽게 주동자로 대제사장 계급과 바리새파 계급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하속(下屬)들은 성전 경비를 맡은 일종의 경찰로서 이해된다.

 

한편 예수를 체포하러 무리 중에 대제사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산헤드린이 보낸 것으로 이해될 있는데(Lenski)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의 지도층 전체가 개입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등과 홰와 병기 -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는데

 

(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된다.

 

'' '' 고대에 동의어였으나 후대에 와서 등불과 횃불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C.K. Barrett).

 

한편 이때는 유월절(니산월14) 전날이며 당시 월력(月曆) 사용했던 정황으로 보아 거의 만월의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불이 필요치 않을 있으나 당시 상황이 구름으로 인해 흐린 날씨였거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밤중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등과 홰를 언급한 것으로 이해될 있다.

 

요한은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장본인이기에 일기와 관련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 18:4] 예수께서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당할 일을 아시고 -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 부여하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고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험한 피해 자리를 옮긴 적이 있었다.

 

(10: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11: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

 

(17: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부딪치고 있다.

 

 

나아가 - 예수는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려고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이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위있는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수가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한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예수께서 체포하러 자들 앞으로 나아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이 나타나 있으며, 예수가 무기력하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됨을 묘사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절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위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된다.

 

 

 

[ 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나사렛 예수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언급된 본문은 나사렛이란 형용사를 첨가하고 있다.

 

이와같은 형태는 본서에서는 예수의 명패에 쓰인 칭호에서,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이와 같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사용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출생지를 밝히려 했던 의도에 따른 것임과 동시에 동명이인(同名異人)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내로라 - 예수는 '나사렛 예수' 자신임을 아주 짧은 말로 밝힌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해 표현을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표현을 부각시켰다.

 

유다도 함께 섰더라 -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있음을 묘사해 준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에게 맞추어 예수를 체포케 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이다.

 

 

 

[ 1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본문은 예수가 '내가 그니라'라고 말하자 나타난 반응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해 주고 있다.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스스로 있는 '라는 3:14 70인역(LXX) 연상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신적 권위가 강조됨은 물론 예수의 승리자의 모습으로 죽으셨음이 확인된다.

 

 

 

[ 18: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 4절과 동일한 질문이 반복되고 5절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독자성, 예수가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의 권위있는 위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깔려 있다.

 

한편 요한은 5절의 '대답하되' 본절에서는 '말하되' 바꾸어 표현했다.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싫어하는 요한의 습관에 따른 것이다.

 

 

 

[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사람들의 가는 - 예수는 적들이 찾고 있는 예수가 자신임을 거듭 확인시키고 대신 자신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수 있도록 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

이것은 요한의 독특한 자료로 14:50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다.

 

( 14:50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표현하고자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의 이같은 행동은 10:11에서 예견 바로서 이는 예수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예언의 성취를 나타내는 본문의 어투는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구이다.(C.K.Barrett, A.T. Robertson).

 

여기서 성취된 예언은 17:12 가리킨다.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특히 17:12에서 언급된 멸망의 자식이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이미 유다가 악의 세력에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언의 성취에 관한 언급은 예수 자신의 말을 성경적 권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