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거듭난 삶 2019. 10. 15. 00:16
728x90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 앞으로 데리고 나옴

 

: [ 19:4-13]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박으소서 십자가에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박을 권한도 있는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자의 죄는 크다 하시니라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히브리 말로 가바다)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 19:4-5]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사람이로다 하매 -

 

빌라도는, 맞아 비참한 모양을 이루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거리로 보여 주었다.

 

4 절에 "보라" 말이 있고, 5 절에도 "보라" 말이 있다.

 

예수님을 때린 것도 그에게 대한 극단의 모욕인데, 그렇게 모욕 당하신 그의 모습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극단적 모욕의 이중인 것이다.

 

빌라도가, 맞아 상처 입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구경시킨 목적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동정을 얻어서 진리를 세우려는 모순이요,

세상의 도움을 구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려는 모순이다.

 

이렇게 빌라도는 나약한 타협을 문제 해결의 최고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일의 열쇠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1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빌라도의 그릇된 사상을 책망하심이다.

 

 

 

[ 19: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박으소서 십자가에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 - 그들이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라고 번씩이나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 대한 그들의 지독한 미움을 표시한다.

 

무죄하신 예수님을 때려서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므로 문제 해결을 보려던 빌라도의 악한 타협주의는, 이렇게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진리를 위한다는 자가 비진리와 타협하면, 언제나 진리를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진리를 무너뜨린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박으라 - 말도 빌라도가 결단의 취지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로써 나약의 태도를 나타낸 뿐이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 유대인들의 태도가 빌라도의 약점을 알고 굳세어짐을 보아서 있다.

 

 

 

[ 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빌라도에게 대한 그들의 협박이다.

그들은 이제 빌라도의 나약함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법이 있다" 함은, 하나님을 훼방한 자나 거짓 선지자를 죽일 있는 종교적 법이었다.

 

( 24: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회중이 돌로 그를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18: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마음대로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이렇게 악한 죄인으로 여겼다.

때에 예수님의 고통은 무한히 컸을 것이다.

 

진리는, 사람들이 불신앙하는 때에 가장 고통을 당한다.

 

* 참조 ( 1:12-14 너희가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19:8] 빌라도가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 말씀은, 빌라도가 재판에 있어서 무리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인하여 의리대로 결단하지 못하는 약한 태도를 지적한다.

 

빌라도는 재판에 있어서 줄곧,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에 이르러서는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구절은 말한다.

 

그가 더욱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 유대인들의 태도가 강경하여 재판건에 그를 의뢰하지 않을 기세를 보인 까닭이며,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법대로 하면)

 

 

(2)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는 유대인들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7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그릇된 종교적 관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어떤 () 대한 칭호인 줄로 짐작은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주는 일도 그에게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판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예수님에게 가서 심문한 것이다.

 

 

 

[ 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너는 어디로부터냐 -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내력을 물음이다.

 

,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나이다"라고 ) 듣고 겁이 나서,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알아보려는 질문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으려는 진실한 질문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벌써 빌라도에게 분명히 증거하신 있는데,

 

(18:33-37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다시 질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불신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시지 않았다.

 

10절과 11 - 구절은, 최고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는 아는 빌라도의 인본주의와, 모든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예수님의 신본주의를 대조시킨다.

 

 

 

[ 19: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박을 권한도 있는 알지 못하느냐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박을 권세도 있는 알지 못하느냐 - 빌라도는 말로써 자기의 무식과 교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인간인 자기가 최후 단안을 내릴 있는 권세의 소유자라고 자처한다.

 

그것은, 모든 권세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이다. 이런 무식은 그에게 교만을 낳아 주었다. 언제나 교만은 무식의 아들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겸손해지는 법이다.

 

 

 

[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자의 죄는 크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해할 권세를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는 예수님을 해하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

 

빌라도는 사람만 보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만 보시고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정치적 권세도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받을 없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자의 죄는 크니라 - 말씀에 대한 해석은 가지 있다.

 

(1)빌라도의 정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그것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했으니, 죄가 더욱 크다는 뜻이라고 (Calvin).

 

(2) 슐라텔(Schlatter) 말하기를, "빌라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잘못 사용한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죄는, 받은 권세 없이, 또는 예수님을 잡도록 강요된 일도 없이 행동한 자들(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죄보다는 가벼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Pilatus Missbraucht die ihm gegebene Macht und das ist Schuld; sie ist geringer als did Schuld dessen, der ohne * handelte, den also nichts notigte, sich an Jesus Zu vergreifen.- Der Evangelist Johannes, p. 345).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에게 넘겨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죄악은 크다. 해석이 유력하다.

 

말씀을 보면, 부패한 시대에 옳지 않은 교역자들이 정권에 붙어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을 핍박함이, 무엇보다 죄악임을 있다.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라도는,

공포심에 끌려서 그를 넣으려고 다시 애쓴 것이다.

빌라도는, 한편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가진 것이다.

 

 

 

[ 19:13] 빌라도가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히브리 말로 가바다)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 유대인들이 쓰던 말로는 가바다라고 하는데

언덕을 의미한다. 이곳은 아마도 돌을 깔아 놓은 높은 장소를 가리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