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거듭난 삶 2021. 1. 10. 00:05
728x90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성 경: [삼상 3:1-9]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아이 사무엘 - 여기서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넓은 의미로는

유아(infancy)의 나이로부터 청년기(adolescence)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나, 대체적으로는 '소년(boy)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다(Antiquities, V.10, p4).

 

한편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를 성년으로 간주했으므로,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하나님께서는 그 통념을 인정하셔서 그때 사무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토록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 '엘리 앞에서''엘리의 감독을 받으면서'란 뜻이다.

그리고 '섬긴다'(솨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28:35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43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후손의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9:;30 그를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섬길 때에는 칠 일 동안 그것을 입을지니라;

 

16: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대상 15:2 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대하 8:14 솔로몬이 또 그 부친 다윗의 정규를 좇아 제사장들의 반차를 정하여 섬기게 하고 레위 사람에게도 그 직분을 맡겨 매일에 합의한 대로 찬송하며 제사장들 앞에서 수종들게 하며 또 문지기로 그 반차를 좇아 각 문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에 이렇게 명하였음이라).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 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여호와의 말씀 -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계시(神的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

 

(38: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다.

 

(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한편 여기서 '보이지'(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이다(Driver)

 

(3: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74:9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상 - (하존). 또는 '환상'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視覺)이 아닌

 

(29:7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黙示, revelation)를 가리킨다(Lower).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五感)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자아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이다.

 

 

[삼상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 이와같은 사실은 나이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다.

 

(4:15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그러나 본 구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 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을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또한 엘리 제사장이

4-9절의 내용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4-9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 성막의 입구 쪽 별관 정도였을 것이다(Klein).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附帶) 시설들,

 

*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

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 등.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R. Payne Smith).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하나님의 등불 - 이것은 매일 저녁마다 성소(the Holy Place)의 안을

밝히기 위하여 켜지는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이다.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 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이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등의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는 새벽까지

계속 켜져 있었다.

 

(30:8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앞에 끊지 못할지며;

 

2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연한 새벽이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말이다(Keil).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taberna-cle)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서는 '여호와의 전'(헤칼 예호와)은 법궤 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the Holy of Holies)

분향단이 있는 성소(the Holy Place)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맛소라(Masoretic Text)1:9에 이어

 

(1: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로 취한 듯하다(Keil Delitzsch, Vol. -ii, p. 49).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支聖所, the Holies)안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

 

(26: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殿, 헤칼)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th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씩 들어갈 수 있는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에서 잠을 잔 것이다(Keli, Fay).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 구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을

본 구절에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삼상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상으로 인해

여화와의 말씀이 희귀하던 때에, 마침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본 구절은 나실인으로서 레위 지파의 헌신자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소명받는 순간이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은혜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삼상 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사무엘은

엘리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즉시 일어나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거의 보지 못했다는 2절의 언급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한편 이는 당시 사무엘이 대제사장 엘리의 인정을 받고,

그의 개인 시종의 역할도 감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헛것을 들은 줄로 생각해버린 듯하다.

 

 

[삼상 3: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내 아들아(베니). - 본래 이 말은 나이나 신분상의 차이가 현격할 때,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정하게 부르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에 덧붙여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난감한 심정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한편 이같은 표현은 특히 본서에 많이 나온다.

 

(16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가로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4: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 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 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24: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26: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삼상 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본 구절은 사무엘이 세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제대로 응답치 못했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그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했다'란 말의 의미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와 전인격적인 개인적 교제가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다'(야다)란 말은 단순한 지식적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녀가 동침하듯 체험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따라서 여기 '알지 못하고'

사무엘이 율법을 배움으로써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은 아직 없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처럼 사무엘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삼상 3:8-9]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육이 노쇠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희귀(稀貴)한 상황 탓으로

처음 두 번은 사무엘의 행동을 단순히 착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무엘의 행동을 보고,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사무엘을 세 번씩이나 부르신 이가 여호와인줄

늦게나마 깨달은 엘리 제사장은 이제 동일한 부르심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사무엘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이다(Kl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