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거듭난 삶 2022. 2. 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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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성소(聖召) 3

 

이사야서 62-4: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

3)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크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그 외치는 자의 음성으로 인해 문기둥들이 흔들리며 그 집이 연기로 가득하게 되니라.(한글 KJV)

 

 

스랍 각자에 3대의 날개가 있었다.

 

1대로서 얼굴을 가리고,

그 다른 1대로서 발을 가리고,

나머지의 1(두 날개)로서 공중을 날아 다녔다.

 

얼굴을 가린 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눈부신 광채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을 가린 것은 주전을 삼감에서이다.

 

이리하여 천사는 겸손했다.

얼굴을 들어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했다.

발을 보여 주전을 부정케 함을 두려워했다.

 

예절은 위선이 아니라, 겸손의 표현이다.

천사에게마저 예의가 있다.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랴!

 

저속한 프로테스탄트 주의는 미국의 저속한 민주사상을 낳고,

그 결과로써 예절을 땅에 떨어지게끔 한 것은 탄식해 마지 않아야 할 일이다.

 

여호와의 신성을 지킴에 스랍(복수는 세라핌)의 두반이 있었다.

혹은 한 짝이었는지도 모른다.

두반은 서로 창화(한쪽에서 부르고 한쪽에서 화답)했다고 한다.

음악에서 말하는 안티폰, 즉 답창가이다.

 

그가 노래하고, 나는 이에 화답하는 유()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6:3)라고 제 1반이 노래하면,

 

그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도다’(6:3)라고 다른 일반이 화답하여 노래했으리라.

 

장엄하기 그지없는 천사가 조직한 창가대의 합창이다.

지상의 작곡가는 약간 이것에 흉내 낸데 지나지 않는다.

 

헨델, 하이든, 베토벤(1250, 역주참조)도 겨우 이것을 모방한 정도이다.

 

욥기 387절에,

천지의 기초()가 놓여진 때에

 

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기뻐 외쳤도다’(일역)

라고 있음은, 안티폰의 다른 예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 번 되풀이해서 말함은,

거룩함을 고조함의 표현방식으로서,

완전히 거룩하다는 뜻이다.

 

혹은 의로 우시고, 은혜로우신,

능력 있는 완전하신 하나님이라고 해석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것을

트리스아기온(TRISAGION)’성명삼칭이라고 일컫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미한 말이라고 불러왔다.

 

의미는 심원하여, 어떻게도 이것을 해석할 수가 있다.

 

성에 가까이 말지라의 의미가 있다.

또 순정의 의미가 있다.

 

여호와의 성안은 악을 보기에 견디지 못하신다는 그 거룩이시다.

마음의 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단순히 의식적인 성이 아니다.

윤리적, 도덕적인 성이다.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그 영광 온 땅에 가득하도다’,

 

만군의 여호와

삼라만상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가장 적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전쟁의 신이 아니다.

조화의 신이시다.

그는 묘수(4124, 342역주 참조)의 띠를 매고

삼수(4124)의 띠를 푸시며,

열두 궁(4343 역주)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시고,

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시는 이시다.

 

(욥기 38:31-32 청하건대 내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게 하며 사람에게 아첨하는 호칭을 붙이지 말게 할지니

22) 나는 아첨하는 호칭 붙이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하면 나를 만드신 분께서 나를 속히 데려가시리로다).

 

 

그리고 이 조화의 신이 성이시라고 한다.

신망애의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긍휼히 여김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위대한 사상이다.

하나님을 작은 사랑의 신으로 보는 자는 있다.

또 크신 능력의 신으로 보는 자는 있다.

 

하지만도 우주의 신,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즉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으로 본 자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외에 없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이것은 신앙의 목표로서 철학의 궁극이다.

이 하나님을 발견한 때에,

종교도 철학도 그 종극에 달하는 것이다.

 

그 영광 온 땅에 가득하다고 한다.

 

예언자도 여호와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함을 보았다.

그런데 스랍은 말했다.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

 

천사는 예언자보다도 이상의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천사의 본 바가 진리이다.

그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다.

그 구석구석 모든 곳에 가득하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바다에도, 육지에도,

물 한 방울에도, 흙 한 덩어리에도,

원자 엘레크트론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광은 충만해 있다.

 

우주의 신은,

지상의 신이다.

외재의 신은 내재의 신이시다.

그리고 한 가지로 거룩한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은,

이것으로 극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2천년에 걸쳐,

철학자가 노력하여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2600년 전의 옛날,

이사야는 천사가 그에게 전해줌을 들었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6:4)고 있다.

 

천사합창의 소리는 커서,

성전의 문지방 터가 동요되고,

그 안에 연기가 가득 찼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남성의 굵은 것이었으리라.

장엄한 소프라노가 아니라,

베이스이다.

 

성전의 문지방 터(기초)를 요동케 하고,

그 때문에 연기(사연)가 올랐다고 한다.

 

여호와를 찬미함에 그러한 소리가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예배도 이에 이를 때 유력하다.

 

하지만 이는 예술이어서는 안 된다.

성서의 이른바 찬미의 제사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광경인저!

 

말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서술은 완전하여,

조금도 보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장엄무비한 광경이다.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도다 세계사람 그 앞에서 조용히 할 것이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하박국 2:20 한글 개역)라는 광경이다.

 

이사야는 어떻게 하여 그 같은 이상에 접했던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그의 상상이었을까?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본 광경이 너무나 장대하다.

또 그 의의가 너무나 심원하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이상으로 봄이 적당하다.

 

이는 활화(活畫)로써 주어진 계시이다.

물론 그림은 그가 해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특히 그리신 것이었다.

 

 

*내촌감삼의 (19285성서지 연구’)를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