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성소(聖召) 5
성경 : 이사야서 6장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한글 KJV)
젊은(청년) 예언자는,
여호와의 성소에 응했다.
그는 그 명령에 따를 것을 아뢰었다.
그런데 그 명령이란,
받들어 준행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나라의 멸망과 백성의 부수를 선고하는 일이었다.
애국자에게 있어서 이렇듯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예언자는 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같이 고하도록 명령되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9-10 한글 개역)는 것.
이것은 절망적 상태이다.
백성은 구원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라,
보여 주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깨닫게 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막히게 하며 눈을 닫히도록 하기 위해
말하고, 또 보여 주라는 것이다.
즉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멸하기 위해 전도하라는 것이다.
일찍이 이런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임한 일은 없다.
아무리 절망적 상태에 놓여져 있대도,
백성을 섬멸하기 위한 전도는,
이때까지 시도된바 없었다.
이사야는 이 음성을 듣고서,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이것을 받아들였을까?
여호와는 긍휼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여호와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기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 34:6-7)이시라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밝힐 리 없다고 청년예언자는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사람은 이것을 취마해서는 안 된다.
그가,
멸망을 선고하시면,
참된 예언자는 멸망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고통스러운 직분이다.
이사야는 여기서 예언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하면서 반문했던 것이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6:11)고.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런 두려운 예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고.
이에 대한 여호와의 대답은 더욱 준열한 것이었다.
‘성읍들은 항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나라)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되리라’(6:11-13 한글 역)고.
즉 섬멸되지 않으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상수리나무.’란,
아마도 후세의 기입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무 준열한데서,
이것을 완화시키기 위해,
후세의 학자가 여기에 이 기입을 했으리라는 것은,
체인(1841-. 9. 18-1915. 2. 16 영국의 신학자-5권 10p참조)
그레이(본권, 81p역주 참조),
기타의 구약성서 학자의 의견이다.
이 같이 하여, 이사야 성소의 이상은 끝났다.
견신으로 시작하여,
신명으로 끝났다.
여기서 이사야는 완전히 여호와의 예언자로 되었다.
자기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의지,
이것이 그의 의지로 되었다.
이것을 일컬어 컨버션이라고 한다.
소위 영혼의 교체(갈아 넣음)이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죽고,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가 난 것이다.
그는 완전히 여호와의 부로(俘虜)로 되었다.
그는 이제 이후
‘어찌해서(왜)’라고 물을 것은 아니다.
다만 복종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마치 모범적 군인이,
이유를 따지는 일 없이,
다만 대장의 명에 순사하는 것과 한가지다.
자기의 신관,
또는 인생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하나 자기의 이성에
호소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명하시는 일에 다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예언자의 위대한 바가 있다.
이 절대적 복종이 있기에만 그들은 큰일을 했던 것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물론이고,
루터(2권 271 역주), 녹스(2권 271), 크롬웰(6권 87p 역주)등도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던 까닭에,
그들이 영구히 인류를 이익되게 한 것이다.
그들은 이른 바 정과 눈물의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이라 해석하여,
그 사랑에 기준하여 만사를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쇠 같은,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오로지 여호와의 명을 전했다.
그러므로 잔혹 무자비의 사람으로 불렸다.
그들은 얕게 백성의 상처를 고치는 거짓 예언자(선지자)는 아니었다.
국민의 존재를 걸고,
그 죄를 제하려했다.
유다에 이 종류의 예언자가 없었던 까닭에,
일단 망했다가 다시 부흥하고,
다른 국민은 모두 망했지만,
그들만 살아남아(생존하여),
영구히 인류의 대교사로서 있는 것이다.
시험 삼아 생각하라.
만약 스코틀랜드에
존 녹스(녹스 2권 278p 역주)가 출현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고.
소국에 겨우 600만의 인구를 가지고서 영국을 가르치고,
세계를 지도하고 있는 이유는,
확실히 이사야형의 예언자 녹스의 사업세 있음 아니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때로는 죽이시고 멸하시는 것이다.
욥이 말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욥 13:15)고.
우리들은 신앙에 의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하는 근대인은,
하나님을 모르며,
그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년 6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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