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성소(聖召) 2
이사야 6장 1-2절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또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2)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한글 KJV)
때는 그리스도 강세 전 340년경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모름지기 20세를 많이 넘지 않은 청년이었으리라.
그는 큰 이상을 보았다.
이 이상에 의해 그의 생애의 방침은 정해졌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에 빛나는 예수를 만난 것과 대비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사야는 이전에도, 후에도 많은 이상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최대의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입은 성소(聖召)였고,
또 그에게 임한 개신(改新)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는 일변했다.
이때부터 그는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여호와의 예언자로 되었다.
이 해에 유다 왕 웃시야(본서색인 참조)가 죽었다.
그는 남방 왕국 중흥의 왕이었다.
그는 16세에 위에 오르고, 그의 치세는 52년 계속되었다.
그는 신앙 바르고, 국정을 그르치지 않고,
국위를 사위에 미치게 하고,
남방 에돔을 정복하고,
홍해 엘랏에 항구를 쌓고,
홍해연안에서 뻗어
인도, 페르샤(이란)와 무역했다.
그의 치하에 유다는 다시 강국이 되었다.
‘그들의 나라는 황금과 백은으로 가득하고 그 재보는 한 없도다 그들의 나라는 또 말로서 가득하고 그 전차의 수 한 없도다’(이사야 2:7 일역)고 예언자가 앞에 말한 대로였다.
사실은 역대 기하 2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왕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이해에 이사야가 이 대이상을 본 것이다.
이것과 그것과의 사이에 커다란 관계없을 수 없는 것이다.
웃시야 왕의 죽음은,
우리(일본)메이지 덴노우의 붕어에 비할 만한 것이다.
장한 긴 치세의 종말이다.
국민전체가 커다란 충동을 받고, 커다란 실망에 잠겼다.
마치 태양이 서산에 빠진 감이 있었다.
장래 어찌될 것인가고 생각하여,
사람마다 의구심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전국 양암에 들어간 때,
이사야는 이 이상에 접했던 것이다.
밤일지 아침일지.
암흑일지 광명일지.
그는 양암에 관명에 접했다.
그럼에도 그 광명은 암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후에 들은 음성을,
그는 지금 이상으로 본 것이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21:11-12)고.
그의 영안에는 아침과 밤,
구원과 심판이 번갈아 교대로 왕래했다.
지상의 대왕은 갔다.
그때 천상의 대왕이 나타나셨다.
마치 태양이 지고서 창궁의 삼란상이 나타남과 같은 것이다.
지상의 영화는 천상의 영광을 덮어 가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메이지시대(1868-1912)가 그것이었다.
나라는 밖으로 국위를 발휘하고,
안으로 급격한 진보를 하며,
일본인의 영성은 부로 퇴보하고, 천상의 빛을 잃어,
대이쇼(대정 1912-26년간의 일본의 가인요시히또 1879-1926 ‘의 통치기간),
쇼-와(소화 1926년 12월 25일 이후)
영적암흑을 불러왔다.
유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웃시야의 치세는,
밖으로 좋은 데가 있었고,
안으로 나빴다.
나라는 금과 은과 말과 전차로 가득 찼으나,
여호와는 그 얼굴을 감추셨다.
사람이 높이 되고 하나님이 낮추어졌다.
그리고 그 사람이 데려간 바 되어,
국민 모두 우수의 구름으로 쌓인 때에,
여호와는 예언자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나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심을 보았었노라’(2:1 일역)고.
실로 위대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수없이 되풀이 되는 사실이다.
밖의 손실은,
안의 이득이다.
인생의 사건에 모두 대상(compensation 代償)이 있다.
하나님은 그 자신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손실을 보상하신다.
이 보상을 모르고서,
손실을 모두 손실로 여기는 백성은 화 있을진저.
여호와는 성전에 임하여,
그 자신을 예언자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하지만 이사야가 경배한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옷자락이었다.
그는 대왕을 그 발 받침대에서만 경배했다.
지상의 신하가 그 왕에게 가까이 함에 있어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지 못하고 다만 그 발아래 부복한다.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때에 있어서야!
겨우 그 옷자락을 경배할 수 있었음은 당연하다.
이사야는 많은 근대인이 바라는 바와 같이,
소위 견신의 희락에 잠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례하게 가벼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그 옷자락을 경배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겸손 없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 옷자락에만 대도 나으리라’(마태복음 9:21 일역)고 한,
12년 혈루병부인의 신앙과 겸손이다.
이것 없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철학을 가지고서 신을 보려하고,
신학으로써 그리스도를 이해하려하는 근대의 젊은이가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해득하지 못함은,
그들에게 젊은 이사야에게 있었던 이 겸손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옷자락이었다.
기타는 그를 싸서 모신 주위였다.
‘스랍들은 모셨었다’고 있다.
천사에 2반, 있었는데,
그 1반은 그룹이고,
다른 한반은 스랍이라는 것이다.
그룹은 하나님의 위엄을 지키는 천사이고,
스랍은 그 신성을 지키는 천사라고 생각된다.
창세기 3장 끝 절에 말하고 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그것과 이것을 비교해 볼 때 2반의 구별을 알게 된다.
‘모셨었는데(위에 서서-일역)’는,
‘위를 덮다’또는 ‘위를 가리다’이다.
다만 그 옷자락을 나타낼 뿐이고,
그 나머지는 천사가 가리어 모셨다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년 5월 ‘성서지 연구’)를 참조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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