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불타는 숯을 내 입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불법이 제거되고 네 죄가 깨끗하게 되었느니라, 하더라

거듭난 삶 2022. 2. 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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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성소(聖召) 4

 

이사야서 65-8: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므로 망하게 되었나니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 하였더라.

6) 그때에 스랍들 중에서 하나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불타는 숯을 취해 손에 들고 내게로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불법이 제거되고 네 죄가 깨끗하게 되었느니라, 하더라.

8)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시더라.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한글 KJV)

 

 

이상을 보고,

이사야는 하나님을 본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커다란 공포의 엄습을 받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5 한글 개역).

 

여호와는 일찍이 모세에 일러 말씀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

 

그러므로 이스라엘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얼굴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고,

하나님을 본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사사기 13:22).

 

이리하여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복이 아니라, 화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음성이지,

형상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에 접하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사야의 경우에 있어서,

그는 겨우 그 옷자락을 뵈 온 것이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에 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그는 성자로 하여금 사람의 형상을 취하여,

사람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시게 하셨다(빌립보서 2:6-8).

 

이스라엘 사람은 결코 견신을 경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들의 종교의 엄숙함이 있다.

 

참된 견신에, 죄의 자각이 따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뵈옵고(경배할 때),

자기의 부정(오예)을 안다.

죄의 감각을 일으키지 않는 견신은, 거짓된 견신이다.

 

황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뵈었다고 함 같은 것은,

자기의 이상을 꿈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도의적 실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접하여, 도의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의 신성을 알았을 때에,

그는 그 발아래 부복하여 말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8 한글 개역)라고.

 

이사야도 여기서 여호와의 영광을 뵈옵고.

그에게 생긴 것은 강한 죄의 관념이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는 특히 그의 입술의 부정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세찬 말로써 그의 국인의 죄를 책했다.

 

그런데 지금,

거룩하고 거룩하신 여호와의 형상의 일단을 뵈옵고,

자기 입술의 부정을 통감했다.

 

사람의 죄를 책한 자기 입술,

이것이 부정한 입술임을 그는 깨달았다.

 

나는 말씀을 말할 자격 없는 자이다라고 그는 외쳤으리라.

 

그리고 이는 당연한 외침이다.

이사야도 역시 많은 하나님의 종과 함께

자기의 죄를 알아차리기 전에 타인의 죄를 책했다.

사람의 악()을 알고, 자기의 악()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접하여, 자기가 죄인의 괴수임을 알았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고 했다.

 

망해야 할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은 아니다.

나 자신이다.

견신의 직접의 결과는 비하이다.

겸손이다.

 

모든 위대한 일, 모든 심원한 것은,

이 심심한 겸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 죄를 깨닫고, 입술이 닫쳐졌다.

나는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서 말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정했으리라.

 

그렇다.

그가 스스로 말할 때는 지났다.

 

이제 이후는 여호와를 대신하여 말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입술을 거룩히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성결의 사실을 감득키 위해,

여기 또 하나의 이상이 주어졌다.

 

때에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6:6-7 한글 개역)

 

불은 깨끗이 하는 것,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 시니라’(히브리서 12:29)고 한다.

 

제단의 핀 숯(열탄)에 댄 바 되어,

예언자의 입술은 성결해졌다고 한다.

반 비유요, 반 사실이다.

 

비유적으로 보인 사실이랄지!

 

죄를 하늘에 얻어 호소할 데 없다지만,

죄는 하나님께 사유될 때,

송사할 자 없는 것이다.

 

(로마서 8:33-34 누가 무슨 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어떻게 하여 사죄되었는지 별문제로 하고,

이사야는 여기서 확실히 죄를 사함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어,

다시 말할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죄가 명시되고,

죄가 심화되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됨의 자격이 주어진다.

 

모든 것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대로이다.

 

예언자 됨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일하심)로이다.

때에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6:8)

 

사함(성결함)을 입은 젊은 예언자는,

이 음성에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6:8)라고.

 

이사야에게 이제는 주저함은 없었다.

그는 예언의 대임을 감당하려고 자기를 제공했다.

 

죄를 씻음 받음의 결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이에 이르게 한다.

 

그는 움츠려 뒷걸음치지 않는다.

후퇴하지 않는다.

공적 책임의 사퇴는,

주로 죄가 제거되지 않음에서 온다.

 

죄가 제거되고, 자기에게 구하는 마음에 제거된 때 사람은

대담해지고, 쾌활해진다.

 

사람으로 하여금 소인되게 하는 것은 죄,

위인 되게 하는 것은 죄의 삼제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이 세상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를 담당할 자가 없는 것이다.

 

모두 죄로 방해받아,

자기를 버리고서 대책임을 담당치 못하는 것이다.

 

취직난은 언제든지 있으나,

당직난은 고래로 드문 것이다.

 

 

*내촌감삼의 (19286성서지 연구’)를 참조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