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거듭난 삶 2022. 2. 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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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소명(召命)

 

성 경: [6:1-3]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

백성들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

 

(30:28 자기 손으로 지탱하며 왕궁에 거하는 거미니라;

 

1:4 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혹은 여호와의 성전을 뜻한다.

 

(왕하 24:13 그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의 집의 모든 보물과 왕의 집의 보물을 거기서 가져가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주의 성전에서 만든 금 그릇을 다 산산조각 내었더라;

 

29:9 주의 음성이 암사슴들로 하여금 새끼를 낳게 하고 삼림을 드러나게 하나니 그분의 성전에서 모든 사람이 그분의 영광을 말하는도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

 

(12:41 이것들은 이사야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하였을 때에 이른 것이더라).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 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 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왕상 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주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주께서 자신의 왕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그분 옆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었나이다;

 

1:6 이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오니라;

 

6:5 그 천사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이것들은 하늘들의 네 영인데 그들이 온 땅의 주 앞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아가느니라, 하더라).

 

'스랍들'(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을 뜻하는 '사라프'이다.

 

(14:29 온 블레셋이여! 너를 친 자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오고 그의 열매가 날아다니는 불 뱀이 되리라;

 

30:6 남쪽의 짐승들에 대한 엄중한 부담이라. 그들이 자기 재물을 어린 나귀의 어깨에 싣고 자기 보물을 낙타의 혹에 얹은 채 젊은 사자와 늙은 사자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 뱀이 나오는 땅 곧 고난과 고통의 땅으로 들어가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백성에게로 가리라;

 

21:6 주께서 불 뱀들을 백성 가운데로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으니라,

 

8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를 위해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8:15 너를 인도하사 그 크고 무서운 광야 곧 불 뱀과 전갈과 가뭄이 있고 물이 없는 땅을 지나게 하시고 또 너를 위하여 부싯돌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38:7;29:1,2;4:8;7:11 등이 있다.

 

(38:7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

 

29:1-2 (다윗의 시) 오 강력한 자들아, 너희는 영광과 능력을 주께 드리고 주께 드릴지어다.

2)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

 

4:8 네 짐승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것들의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것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이시로다, 하고;

 

7:11 모든 천사들이 왕좌와 장로들과 네 짐승 주위에 섰다가 왕좌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카도쉬)'영광'(카보드)이었다.

 

'거룩'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14:21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온 땅이 주의 영광으로 충만할 터인즉;

 

57:5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하늘들 위로 높여지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 위로 높여지기 원하나이다,

 

11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하늘들 위로 높여지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 위로 높여지기 원하나이다;

 

72:19-20 그분의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20)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들이 끝나니라).

 

 

다시 말하면,

'거룩'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7:4 너희는, 이것들이 주의 성전이라. 주의 성전이라. 주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21:27 내가 그것을 거꾸러뜨리고 거꾸러뜨리며 거꾸러뜨리리니 그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그것의 권리를 가진 자가 이르면 내가 그에게 그것을 주리라).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