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거듭난 삶 2022. 2. 2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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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성 경: [10:5-19]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6)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8)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11)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14)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18)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감 같을 것이라

19)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10:5]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낸

'화 있을진저'()가 앗수르에게도 적용된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잠시 사용된 후,

그 교만 때문에 역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10:6]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 '한 나라'는 직역하면

'불경한(하네프) 나라'이다.

그 나라는 평행을 이루는 문장에서 '나의 노한 백성'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나의 진노의 대상이 된 백성'이란 뜻이다.

 

(34:5 내 칼이 하늘에서 흠뻑 적셔지리니, 보라, 그것이 이두매아 위에 임하며 나의 저주를 받은 백성에게 임하여 심판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를 가장 경건한 민족이라 자부하고

앗수르 같은 이방 나라는 신()을 모르는 불경한 민족이라 멸시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정반대로 말한다

 

' 너희들이야말로 불경한 백성이며 앗수르는 너희들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받았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Oswalt).

 

 

 

[10: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부름받은 바,

그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를 깨달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앗수르의 마음에는 이러한 깨달음 대신

중동의 지배자가 되려는 패권주의적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속성이다.

 

(왕하 18:25 내가 주의 뜻도 없이 이제 이곳을 쳐서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주가 내게 말하기를, 올라가서 이 땅을 치고 멸하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10:8]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

 

앗수르가 그 같은 야망을 품은 것이 결코 헛된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이

반어법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앗수르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왕은 위대한 왕의 칭호를 가졌으며,

 

(36:4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위대한 왕 곧 아시리아 왕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신뢰하는 이 확신이 과연 무엇이냐?)

 

그 밑에 있는 방백들마저도

그 지위와 위세에 있어서 다른 나라의 왕들과 버금갈 정도였다.

 

 

 

[10: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

 

이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앗수르가 거둔 혁혁한 전과(戰果)때문이었다.

사실 앗수르가 취하고자 했던 도성 중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의도에서 빗나간 것이 없었다.

 

과거의 자신감을 토대로 앗수르는 미래의 성공을 스스로 예견한다.

 

'갈그미스'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B.C. 717년에 함락되었다.

 

(대하 35:20 이 모든 일이 있은 뒤 곧 요시야가 성전을 예비한 뒤에 이집트 왕 느고가 유프라테스 옆의 갈그미스와 싸우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그를 치려고 나갔으나;

 

46:2-12 이것은 이집트에 대한 말씀이요, 유프라테스 강가 갈그미스에 있던 이집트 왕 파라오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제사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그를 쳤더라.

3)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정비하고 싸움터로 가까이 나아가라.

4) 너희 기병들아, 말에 안장을 얹고 일어나 투구를 쓰고 서서 나아가며 창을 갈고 사슬 갑옷을 입으라.

5)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가는 것을 내가 봄은 어찌된 까닭이냐? 그들의 용사들이 패하여 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도 아니함은 사방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6)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할지니 그들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걸려 넘어지고 북쪽을 향해 쓰러지는도다.

7) 홍수같이 올라오는 이 자가 누구냐? 홍수 같은 물들이 강물처럼 움직이는도다.

8) 이집트는 홍수같이 일어나고 그것의 물들은 강물같이 움직이는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땅을 덮고 그 도시와 그것의 거주민들을 멸하리라, 하는도다.

9) 말들아, 너희는 올라올지어다. 병거들아, 너희는 성내어 날뛸지어다. 용사들 곧 방패를 쓰는 이디오피아 사람들과 리비아 사람들과 활을 쓰고 당기는 루디아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올지니

10) 이 날은 주 만군의 하나님의 날이요, 원수 갚는 날이로다. 이로써 그가 자신의 대적들에게 원수를 갚으리로다. 칼이 삼키며 그들의 피로 충만하여 취하리니 주 만군의 하나님이 유프라테스 강가 북쪽 지방에서 희생물을 취하는도다.

11) 오 처녀, 이집트의 딸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향유를 취하라. 네가 많은 약을 헛되이 쓰리니 네가 고쳐지지 못하리라.

12)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그 둘이 같이 쓰러졌으므로 민족들이 네 수치를 들었으며 네 부르짖음이 땅을 채웠도다)

 

'갈로''갈그미스'로부터 남쪽 50마일 정도에 있는 '갈레'를 가리키는 듯하며

B.C. 738년에 함락되었다.

 

(6:2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서 큰 하맛으로 가며 그 뒤에 블레셋 사람들의 가드로 내려가라. 그것들이 이 왕국들보다 나으냐? 그것들의 경계가 너희의 경계보다 크냐?),

 

 

'하맛'은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B.C.738년과 720년에 함락되었다.

 

(34:8 호르 산에서부터 하맛의 입구까지 너희 경계를 지정하라. 그 경계는 나아가서 스닷에 이르리로다;

 

왕하 14:25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대언자 요나의 손으로 하신 말씀대로 여로보암이 하맛의 입구에서부터 평야의 바다까지 이스라엘의 지경을 회복하였더라,

 

28 이제 여로보암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의 권력 곧 그가 싸운 일과 다마스커스를 회복한 일과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을 위해 회복한 일은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

 

6:2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서 큰 하맛으로 가며 그 뒤에 블레셋 사람들의 가드로 내려가라. 그것들이 이 왕국들보다 나으냐? 그것들의 경계가 너희의 경계보다 크냐?,

 

14 그러나 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보라, 내가 한 민족을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광야의 강에 이르기까지 너희를 괴롭게 하리라),

 

 

 

'아르밧''하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둘 다 수리아의 성읍들이었다. '아르밧'B.C. 740년에 함락 되었다.

 

(왕하 18:34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과 헤나와 이바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져 내었느냐?),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이며(B.C. 732년 함락),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이다(B.C. 722년 함락).

 

언급된 6개의 성읍들은

아마도 지정학적 근접성을 기준으로 하여 배열된 듯하다(Oswalt).

 

 

 

[10:10]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 고대의 정복 전쟁은

신들 간의 전쟁으로 고려되었으며,

신들의 우열은 전쟁의 승패에 직결되었다.

 

'미쳤나니'(마체아)'도달했다', '발견했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굴복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0:11]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

 

결국 앗수르의 최종 목표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앗수르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다른 나라의 우상들, 특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수입된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였다.

 

여기에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다.

여호와에 대한 모독에 이어 앗수르의 파멸이 곧 뒤따름을 보라.

 

 

 

[10: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 - 교만은 사람의 마음에서 발원하여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서 비친다.

앗수르 왕의 이 같은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다.

 

 

 

[10: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

그는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을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해석한다.

 

스스로 도취하는 나르시스적 경향은

'나는 총명한 자라'는 말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는 '내 솜씨가 정말 절묘했어'라는 식의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말과 같다(Calvin).

 

그런데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잔인한 핍박과 약탈이다.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 '용감한 자 같이'를 직역하면

'황소처럼'으로도 된다.

 

(22:12 많은 황소들이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황소들이 나를 둘러싸고).

 

'황소'는 앗수르의 권능의 상징이었다.

 

 

[10:14]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

 

정복 전쟁과 재물 탈취의 용이함이 비유로 묘사된다.

그 용이함은 어미새가 자리를 비운 새둥지에서 알을 줍는 것에 비견된다.

 

만약 어미새가 있었다면

생사(生死)를 각오하고 침입자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강조점은 아무도 앗수르를 대적하거나 저항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

 

교만의 어리석음을 선지자는 날카롭게 공박한다.

도끼와 톱은 유용한 물건이긴 하지만 사람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만약 도끼와 톱이 정반대로 자기들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10: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로 선포되니,

 

하나는 병의 형별이요 다른 하나는 불의 형벌이다.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한다'는 말은 질병을 보낸다는 말이다.

 

(26:16 나 또한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두려움과 폐병과 열병을 내려 눈을 침침하게 하고 마음의 고통을 일으키리라. 또 너희가 헛되이 씨를 뿌리리니 너희 원수들이 그것을 먹으리라;

 

28:22 주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심한 화상과 칼과 마름병과 곰팡이로 너를 치시리니 그것들이 너를 따라가서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이는 앗수르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져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이 죽었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37:36 그때에 주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치매 그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보라, 그들이 다 죽어 송장이 되었더라).

 

 

'영화'는 앗수르의 잘 무장된 군대를 가리킨다(Delitzsch).

그 영화 밑에 불을 질러 깨끗이 소멸시킨다는 말은

앗수르 군대의 급속하고도 완전한 멸망을 비유하는 말이다.

(Vitringa, Rosenmuller, Clericus).

 

선지자는 '불태우다'는 의미의

'야카드' 동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10:17-18]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18)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감 같을 것이라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

 

거룩한 불꽃에의해 소멸될 대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형극과 질려는 앗수르인들의 하류 계층을 가리킨다.

둘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은 상류 계층을 의미한다.

 

이 같은 앗수르인들의 총체적인 파멸은

'전부'라는 말에서 강조되고 있으니,

 

이는 직역하자면 '영혼에서 육체까지'이다.

 

이 말은 전인(the whole man)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이다.

 

(16: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이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소망 중에 안식하리니;

 

84:2 내 혼이 주의 뜰을 사모하여 참으로 쇠약하게 되었사오니 나의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구하며 부르짖나이다).

 

 

 

[10:19]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

 

앗수르의 황폐함은 마치 거대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몇 그루의 나무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광경에 비유되고 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무의 수가 얼마나 적을 것인지는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다'는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어린아이가 셀 수 있는 숫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