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시인으로서의 예언자 예레미야
인조는 모두 예레미야서에서 했다.
본문은 드라이버 박사의 영역에 의했다.
예언자는 시인이요. 시인은 예언자이다.
이자의 사이의 구별을 세우는 것은 아주 어렵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요.
시인은 천연의 마음을 말하는 자라해도,
이자의 사이의 구별은 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해득하지 못하면,
천연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천연을 해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언자는 잘 천연을 해득하고,
모든 시인은 잘 하나님의 뜻을 안다.
예언자도 시인도,
한 가지로 직접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입은 자로서,
사람으로가 아니라,
또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곧 바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자이다.
만약, 억지로 양자의 사이에 구별을 세우려고 한다면,
오인은,
예언자는 옛날의 시인,
시인은 오늘의 예언자라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자는 동계급의 사람이다.
의례에 치중하는 의식가,
문자를 다루는 신학자의 정 반대에 서는 자로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선 자이다.
그리고 예언자 중에서도, 예레미야는 특히 시인적이다.
그의 섬세한 부인 같은 정서는 절로 아름다운 시로서 나타났다.
그의 예언에 조직선 것(체계화된 것)은 없다.
애가가 아니면, 단시이다.
심정 그대로의 분출로서,
그 수미함은, 주로 그 점에 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 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 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예레미야서 4:19, 23-26 한글 역)
이는 그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잘 예레미야의 문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문자에 그의 열정이 옮겨져,
그의 혈관의 맥박을 느끼는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오인은,
여기서 그의 예언전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천연시인으로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실로 예레미야는 예언자 중의 워즈워드(1권 105p 역주)이다.
그는 천연을 느끼는 일이 아주 예리하고,
따라서 그의 사상은 잘 천연의 말로써 나타났다.
그는 물론 하나님의 예언자였으므로,
새삼스럽게 천연을 노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살구나무(매화-일역)도, 무화과나무도, 학(두루미)도, 산비둘기도, 제비도,
기러기도, 표범도, 낙타도, 그에게 시제를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국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함에 있어서,
시인적인 그는, 절로 이들 천연물을 가지고서 말했다.
언제나 깊이 천연과 친근히 하고,
잘 그 마음을 헤아린 자가 아니고서는,
그렇듯 자유롭게, 또 적절하게,
천연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정을 말할 수는 없다.
오인은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 마다 생각한다.
만약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인 이 청년이,
하나님의 사로잡힌바 되어,
예언의 직분을 강요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제 1등의 시인이 되어 세계의 문학을 장식했었으리라고.
예레미야는 그가 받은 최초의 묵시에,
천연물로서 접했다.
그는, 예언직에 취임하여서부터 얼마 아니하여,
어떤 날 교외로 나가,
봄이 아직 쌀쌀한데 살구나무의 그 가지 끝에 백파가 분출됨을 보고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은 그에게 임하여 이르셨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1:11-12)고.
살구나무, 히브리어로 shaked라고 한다.
‘깬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매화 비슷하여,
봄의 시작으로서 한 겨울에 그 꽃을 피우는 까닭에 그렇게 불린다.
그리고 깨어난 나무 꽃 핌을 보고,
예언자의 마음에 곧 떠오른 것은 실제로 보이는 하나님의 존재이다.
지금 불의는 횡행하며,
정의는 잠들고,
하나님 역시 주무시는 듯 생각되어,
예언자의 신앙은 바야흐로 꺼지려 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보라.
살구나무 가지를.
깨어나는 나뭇가지 끝의 흰송이를.
천지는 아직 아주 잠들지 않았도다.
여호와는 세상과 함께 주무시지 않는 것이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조는 일 없도다 또 주무시는 일도 없으시도다’(시편 121:4 일역)
깨어나는 나무, 주무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자는 살구나무를 보고 여호와를 연상했다.
그의 꺼지려는 신앙은,
백화 피기 전의 이 꽃을 보고 부활했다.
하나님은 살구꽃(매화)을 가지고서 예언자에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사케드(깨어나는 나무)에 의해,
샤코드(깨어나는 것)의 마음을 알았다.
여기서 천연물은, 예언적으로 해석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에 의해 예언자에게 임했다.
다만 팔레스틴(1권 299 역주 참조)의 살구나무에 국한 되는 것 아니다.
우리나라의 매화라 해도 같은 것이다.
매화는 봄의 선봉이요, 또 부흥의 예언이다.
매화 꽃피는 곳에 주무시지 않는 하나님은 계신다.
상설, 땅을 덮고,
만뢰(萬籟)소리를 감추고,
세상은 소조(所遭)한 겨울로 화하여,
혁정의 희망이 아주 끊기려는 때,
매화의 한 가지는 오인에게,
공의 내복의 희망을 줄 것이다.
오인은, 매화가 피는 것을 보고 불신자처럼
‘매화꽃 봄보다 앞서 폈도다 보는 사람 드문데 눈은 내리도다’라고 탄식할 것은 아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음을 가지고서,
‘매화는 폈도다. 불의의 겨울은 바야흐로 가려는 도다.
여호와는 이제부터 그 팔꿈치의 힘을 발휘하시고,
그 나라의 봄을 이 땅에 오게 하시는 도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있지 않지만,
살구나무와 흡사한 매화는 있다.
오인은 이것을 보고,
그에게 임한 것과 같은 묵시를 우리 마음에 받아야 할 것이다.
일찍 피는 살구꽃에서,
주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수호와 활동을 안 예언자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보다,
백성의 마음이 완경하여,
제도하기 어려운 것을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하여 말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8:7)
여기에 그 이름을 늘어놓은 새는, 모두 소위 철새들이다.
황새(한글 역에는 학)는, 백로와 비슷하여, 그것보다는 조금 크고,
겨울은 적도직하 아프리카 중부에 있다가,
봄이 옴과 동시에,
북방 팔레스틴로 이전하는 새이다.
산비둘기, 학(두루미), 제비도 마찬가지로
시기를 정하여, 남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시기를 틀림없게 목격한 것이다.
그 이전의 시기를 틀림없게 목격한 예언자는,
이것과 대조하여,
그의 국민의 마음의 변천이 평상 아님을 한탄치 않을 수 없었다.
새의 이전은 그 본능에 의해,
사람의 변심은, 그 의지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사람에게도 도의적 본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있어서,
그가 하나님과 그 정한 율법을 아는 것은,
주로 이 본능에 의한 것이다.
만약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인가,
그는 의력을 가지고서 애씀 없이,
그의 본능이 원하는 바에 따라,
사람됨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새가 본능에 의해 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가야 할 길을 알 듯,
사람도 역시 천부의 본능에 의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또 이어 이를 바 길을 가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본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죄에 의해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은 확실히 새나 짐승보다 못한 데가 있다.
보라, 본능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시베리야의 황야, 북방양의 해안,
짧은 여름빛에 높이 무성한 갈대밭 사이에 부화된 물오리(수조)는,
가을이 오면 발생지를 떠나, 알타이 히말라야(4권 4p 역주)의 험준을 넘어,
멀리 인도의 총림으로 옮기고,
여기서 삼동의 추위를 피한 후,
봄이 오면 또 북으로 북으로 다시 그 발생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대공 중에서 인도하는데 나침반 있는 것 아니고,
그들에게 위험 있는 곳을 지시해 주는 공중안내가 있는 것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능으로써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연 2회,
지구의 주위 4분의 1에 걸치는 장도의 여행을 하게 하시는 것 아닌가!
조류의 이전은 박물학자도 아직 해독치 못하는 천연의 비밀이다.
본능은,
도리이상, 의지이상의 힘이다.
이것을 잃음은, 커다란 손실이다.
이것을 보존하고,
또 회복함은, 커다란 이익이다.
그리고 황새와, 산비둘기와, 학과, 제비는 이것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잃었다.
예언자는 이것을 생각하여,
장대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도 황새가 있다.
비둘기류에는 산비둘기, 호도애, 금구, 청구 등이 있다.
학(두루미)에는, 재두루미, 흑두루미, 흑학 등이 있다.
제비에는 보통 제비 외에, 류뀨 제비, 요적제비, 개천제비(갈색제비)등이 있다.
모두 철새로서, 시기를 정하여,
이 땅에 왔다가, 시기를 정하여 이 땅을 떠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 왕래의 때를 잊지 않는다.
제비는 반드시 그 난 둥지로 귀환하고,
그 일찍이 받은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가을이 오면, 우주 어디론가 날아 가버린다 해도,
봄이 오면, 반드시 또 본래의 옛 둥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가.
그리스도교도라고 하는 자는 어떤가.
그들은 제비보다 나은 데가 있는가.
그들이 올 때는 얼마나 겸손(은근)한가!
그들이 가버리는 때는 얼마나 난폭한가!
그들은 사라져 멀리 북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주가의 은혜는 이미 망각하여
그 문전을 지나가도 이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인 주인에 대하여 그렇듯 부박한 그들은
주 하나님에 대하여는 더욱 불경건하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실은,
그를 이용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로 제비만도 못하고, 백로만도 못하다.
그들은 사람이래서 조금도 존귀하지 않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런 자에 대하여 말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아직 못하고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이사야서 1:3)라고.
천연은 좋은 것도 보여주고, 또 나쁜 것도 보여준다.
천연은 실물로서 하는 선악의 해설이다.
백로는 흰 것은 보여주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보여 준다.
양은 유순함을 보여 주고, 범은 용맹스러움을 보여준다.
비둘기 같이 순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다.
그리고 생래의 천연시인이었던 예언자는,
잘 천연의 이 양면을 해득했다.
황새와, 비둘기와, 제비는,
잘 그 때를 지키는 것으로써 지혜를 보여주고,
자고(自高)는 무익한 업에 종사하는 것에 의해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비보다 못하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고에 흡사한 것이 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예언자는 이르기를,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을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7:11) 고.
사실 그런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자고새의 암컷은, 다른 새의 알을 모아,
이것을 날개 아래서 품어, 자기 새끼를 얻으려 하나,
그것이 제가 낳은 알이 아니기 때문에,
부화된 새끼는, 날아가 버려 자취 없음 같이,
그녀의 노고는 무익하게 끝나는 것은,
옛사람이 일반으로 믿었던 일이다.
이것을 의심하지 않은 예언자는,
불의한 부자를 어리석은 자고새의 암컷에 비유하여 말했다.
‘정도에 의하지 않고서 재산을 만드는 사람은 자고새와 같다.
그 재산은 그의 생명 중도에 날개가 자라 떠나가 버리고,
그는 생애의 끝에 있어서 큰 어리석음을 볼 것이다.’
익살을 섞은 힐책의 말이다.
하지만 불의한 부자를 평하고도 남음이 있는 말이다.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은 자기 새끼가 아니다.
이것을 부화하는 것은 전혀 무익한 노고이다.
의에 의해 이룩되지 않는 재산은 자기의 재산이 아니다.
아무리 애써 이것을 배양한대도,
그것이 오래 자기 몸에 붙어 있을 리는 없다.
악전 몸에 붙지 않고, 불의의 산은, 날개가 나서 날아가 버린다.
정권을 이용하고, 우민을 속여,
백천만의 부를 만든대도,
그 부는 도적질한 부로서,
정당하게 자기의 소유로 된 것은 아니다.
자고새를 거울 삼으라,
자고새의 어리석음을 배우지 말라,
세상의 축재에 여념 없는 자여 하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말했던 것이다.
새로서 꾸짖고, 새로서 깨우친 예언자는,
또 짐승으로서 말하고, 짐승으로서 가르쳤다.
죄에 빠진 백성은, 공증을 나는 새에 비하기보다는,
오히려 땅을 기어 다니는 짐승에 비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무엇에 비유하랴!
예언자는 이르기를
‘너는 발이 빠른 젊은 암 약대가 그 길에 어지러이 달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2:23-24)라고.
이는 시가의 경지를 벗어나, 격렬한 말이다.
더구나 도리의 경지를 벗어나 육욕의 요구.
이것을 도락으로 하는 백성에 대해서도, 가장 적절한 말씀이다.
시는 반드시 여사는 아니다.
때로 부끄러움의 나체를 파헤치는 것도 역시 시인의 천직이다.
중국말에 표변이라는 숙어가 있다.
선으로 옮긴다는 뜻인데,
표범의 모피를 변경하여 무늬를 내는 일,
빈위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역경에
‘군자는 표변하고, 소인은 혁면한다’(군자표변, 소인혁면)고 있다.
(여기서의 표변은 좋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가 본 표범은 전혀 이것과 다르다.
그가 본 표범은 변치 않는 표범이다.
그 검은 것, 둥근 얼룩무늬는 종생 그 피모에 남아 있어,
없이 하려고 해도 없이 할 수 없고,
씻어버리려 해도 씻어 버릴 수 없다.
이에 있어서, 저 유명한 ‘표범의 반점(얼룩무늬)의 비유가 나온 것이다.
‘구스인(에티오피아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
에티오피아인은 생래의 흑인이다.
그들은 아무리 원한대도,
그 흑단색의 피부를 바꾸어,
눈 같은 살갗으로 할 수는 없다.
표범의 반점(무늬)은 생래의 오점이다.
이는 빨아도, 닦아도, 없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에 나서, 그 가운데서 자란 사람의 죄는 생래의 죄이다.
이것을 없이 하려는 것은,
에티오피아 사람이, 그 피부를 바꾸려는 것과 같이,
표범이 그 반점을 없이 하려는 것만큼 어렵다.
이는 도저히 인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예언자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사람의 마음은 온갖 것 보다 거짓된 것이로다. 이는 개선의 희망 없을 정도로까지 악하도다’(예레미야서 17:9 일역)
흑인의 피부와 표범의 반점,
이것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
세상에 변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다.
도덕은 말해져도, 정치는 고쳐져도,
미술과 학술은 아무리 진보한대도,
변함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이는 절망적으로 악한 것,
이것을 고치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으면(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절망의 말을 발한 예언자는,
뒤에 개변의 희망을 진술하여 말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 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하지 아니 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1:31-34 한글 개역)
에티오피아인의 피부도 마침내는 눈같이 희게 될 것이다.
표범의 반점도 마침내 없이 되어 얼룩무늬 없는 흠 없는 양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죄에 익숙해진 사람이 마음도,
의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사의 훈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온전한 자로 되리라고.
예언자는 책망만 하는 것 아니다.
또한 위로도 한다.
상하게만 하는 것 아니다.
또한 치료하기도 한다.
표범의 반점(무늬)으로서 시작하여,
천사의 옷으로서 끝난다.
예언자는, 필경에는 훈위사이다.
예레미야의 시인적 관찰은,
초목금수의 생물에만 그치지 않는다.
산천, 광석의 무생물에 미친다.
하지만 그는 작고 손 가까운 것을 택하고,
크고 광원한 것을 피했다.
대폭을 노래하지 않고서, 소천을 찬미 했다.
암석에 비하지 않고서, 보옥에 비교했다.
시인으로서의 예레미야의 수미함은,
그가 국인의 죄과를 하늘에 호소한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늘아, 이 일로 놀라라 심히 떨지어다라고 여호와 말씀하시는 도다.
내 백성은 두 가지 악행을 했도다. 그들은 물 샘인 나를 버리고
자기를 위해 물웅덩이를 팠도다.
물을 저수치 못한, 터진 물웅덩이를 팠도다’ (2:12-13 일역)
‘생수의 샘’이란,
잇달아 줄기차게 솟아나고, 마르는 일 없는 천연의 샘이다.
이에 대하여, 물웅덩이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서,
그 양은 적고, 그 공급에 한정이 있다.
천연의 샘과 인위의 물웅덩이,
하나님과 정부 또는 교회,
전자는 무한하시고, 후자는 유한이다.
전자는 언제나 신선하고, 후자는 언제나 부패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즐겨 하나님을 버리고서 관리와 역자가 된다.
물을 저수치 못하는,
터진 물웅덩이인 정부와 교회에 의지한다.
금강석은 돌 가운데서 가장 견고한 것이다.
이것으로써 바위의 면도 쉽게 쪼을 수 있다.
이것을 안 예언자는 유다의 죄를 진술하여 말했다.
‘유다의 죄는 철필로 기록되도다 금강석 끝으로서 기록되도다.
그들의 마음의 돌비에 새겨졌도다. 그들의 제단 모퉁이에 새겨졌도다’(17:1-일역)라고.
유다의 죄는,
철필, 금강석 끝으로서,
그 마음의 돌비(한글 역은 마음판) 위에 새겨 진다는 것이다.
실로 세찬(강한) 말이다.
잘 금강석의 견고함과 사람의 마음의 간악함을 안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기타, 예레미야서 전편을 통하여 이와 비슷한 것은 적지 않다.
오인은 이 글을 읽는 때마다.
영국시인 죤 게이의 유명한 작품인
‘목자와 철학자’중의
다음의 일구(一句)를 생각해 내지 않을 수 없다.
‘천연의 법칙을 탐구하여 그 진리에서 훈계를 인용 할 것인가?
‘사람은 학문에 의하지 않고서 잘 현명하고 선하고 지혜로울 수 있으리라’
*내촌감삼의 (1909년 4월 ‘성서지연구’)를 참조.
'Edengol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에 나타난 가장 깊은 신앙을 맛보려고 하면, 반드시 예레미야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0) | 2022.08.26 |
---|---|
예레미야는 유다가 낳은 최대의 예언자이다 (0) | 2022.08.25 |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꽃처럼 애인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0) | 2022.08.23 |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0) | 2022.08.22 |
예레미야는 아직 예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0) | 2022.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