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구약에 나타난 가장 깊은 신앙을 맛보려고 하면, 반드시 예레미야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거듭난 삶 2022. 8. 2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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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시대

 

(예레미야서 11-2절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가운데 하나인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들이라.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 시대 곧 그의 통치 제십삼년에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고)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에 있어서,

예레미야는 가장 현저하고, 또는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는 분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언의 정신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가장 깊은 신앙을 맛보려고 하면,

반드시 그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또 그의 이상한 고난 순교의 생애는,

그의 뒤에 나타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생각게 한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이사야가 말한바 소위 비애의 사람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를 해득하고자 하면,

누구나가 예레미야의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먼저 예레미야의 예언과 신앙을 연구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그가 생존한 연대와 그 역사적 배경이다.

 

예레미야는 과연 어느 시대에 활동한 인물일까?

이것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어떤 확실한 연대를 정할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벨론의 역사(7권 다니엘 역주 참조),

그리스사가 헤로도토스(3290p 역주)의 기록 및 성서의 기사 등에서,

많은 학자의 오랜 동안의 연구의 결과,

오늘에 있어서도, 거의 이것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즉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된 해이다.

이 해가 기원전 587년에 상당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학자의 일치하는 바이다.

 

만약 제 1회의 이 예루살렘 멸망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2차례의 멸망을 당했다).

 

1차는 바벨론에 의해서,

2차는 로마에 의한 기원 70년이다)의 해가 정해진다면,

예레미야가 당시 수도에 있어서, 예언자로서 활동한 것이,

성서에 의해 분명하므로, 그의 생존한 연대를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기원전 587년은, 지금부터 계수하여 2512, 우리나라 짐무덴노(158역주)

 

건국의 제 74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나라의 역사의 연대에, 600여년의 위산이 있다고 하면,

이는 실로 짐무덴노 이전 600년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11절에,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고 있다.

 

예루살렘 멸망에 앞서 예레미야의 시대에 있어서,

4인 또는 5인의 왕이 유다를 다스렸던 것이다.

 

즉 요시야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31, 치세하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 이에 대신하고, 불과 3개월 왕위에 있었고,

, 애굽왕 느고(네코)에 의해 폐한 바 되고,

 

그 형제 엘리야김(고쳐서 여호야김)이 세워져 11년 동치하고,

이어서 그 아들 여호와긴(여고냐)3개월 유다를 지배했다.

 

이때 바벨론왕의 군대가 공격해 와서,

왕과 백성을 포로하여 이를 바벨론으로 옮기고,

여호야긴의 형제 시드기야를 예루살렘에 남겨,

앙되게 했던 것이다.

 

그는, 치세하기 11, 바벨론에 반역하여,

느부갓네살(-다니엘 역주참조) 왕이 스스로 대군을 인솔하여 가지고 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마침내 불로서 도성을 불살라,

예루살렘은 여기서 전멸되고 말았다(열왕기하 22-25; 역대기하 34-36).

 

그러므로 요시야의 즉위에서 예루살렘 멸망까지, 모두 536개월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성소가 요시야왕의 13년이라는 기록 있고 보면,

국도 멸망 시 예레미야는 적어도 40년간 은혜 언자로서의 생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왕과 백성의 죄를 책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께로 귀향할 것을 권해 왔던 것이다.

 

다음으로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의 성소를 입은 것은, 몇 살 때였던가?

 

이것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도,

예레미야서 16절의 말씀에 의해 거의 추정할 수가 있다.

 

여기 어려서(한글 역-아이)’라고 있는 원어란 청년이라는 뜻이다.

 

이 청년기를,

지금 가령 16, 17세에서 25, 26세의 사이라고 하면,

우선 20세 전후라고 생각하여 대차는 없으리라.

 

예레미야는 그러한 약소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만민 위와 만국위에 세워져,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은 것이다.

 

그의 성소를 20세 때라고 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60세 무렵이다.

이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애는,

실로 부단의 전투, 또 환난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의 최대의 실망과 타격은 물론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게다가 그의 슬픔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과 패잔한 망국의 백성과 함께 황폐해진 나라에 머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로, 패역의 백성과 함께,

이방 이집트(애굽) 땅에 끌려가서,

거기서 아마도 그의 순교적 생애를 마쳤으리라.

 

이러한 비통한 경우에 있어서도,

예레미야의 요이와 신앙은 조금도 꺽이지 않고,

그의 정신은 노년에 이르러 더욱더 예리해졌다.

모든 박해 중에도,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여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받은 예언자의 사명을 최후까지 지켜 나아갔다.

 

우리들은 오늘날 그의 사후 2500여년,

성서에 있어서 그의 말씀을 읽고,

우리의 양심을 각성케 되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에 있어서의 2,500년은, 실로 장년월이다.

 

그런 먼 옛날에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사상과

심원한 신앙 있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다만 경탄할 것 밖에 없다.

 

그리스에 소크라테스(170p 역주),

플라톤(3219 플라톤 역주)가 나온 것은,

이것보다 훨씬 후의 일에 속한다.

 

바벨론, 이집트(애굽)는 물론,

오늘날 20세기의 문명세계에,

우리들은 과연 한 사람의 예레미야 같은 인물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진보된 세계사상에 비추어 본대도,

예레미야의 말은 조금도 부족한데가 없을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들의 신앙의 대교사,

인류의 선배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인물을 가지며,

그러한 말을 기록한 성서야 말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됨의 실증이 아닌가?

 

다음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멸망 전 53년간의 유다의 정황이다.

 

이 동안은 왕정쇠퇴, 국내부진의 시기였다.

그 중에서 선한 왕은 요시야 1인으로서,

기타는 모두 악한 왕이었다.

 

나라 어지러워져, 백성 타락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게다가 당시 북방에 앗시리아(앗수르)국 있어서, 맹위를 떨치고,

남으로 이집트(애굽)의 세력 강력한데가 있어서, 서로 비예하고 있었다.

 

2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유대국은,

언제나 양군의 전투지였다.

유다의 존재가 언제나 위기에 처하는 것은,

실로 부득한 바였다.

 

이때 즉위한 이가 요시야이다.

그는 성 영매하여, 잘 마음을 국정에 썼다.

즉위 18년 즉 그가 26세 때에, 유명한 대개혁을 실행했다.

 

우상숭배를 폐지하고,

그 단을 헐고, 민간에 성행하는 폐풍을 일소했다.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이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발견된 것도 이때였다.

 

예언자 예레미야도 당시 아나돗에서 이 개혁을 기뻐했으리라.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참조),

 

열왕기 기자는 예찬하고 있다.

그렇지만, 요시야는 또 너무나 성급한 왕이었다.

 

여기서 애굽왕 느고(네코),

앗수르(앗시리아)의 뒤를 이은 바벨론을 공략하고자,

그 국경인 유프라테(유프라테스-성경) 강을 향하여 진격해 왔다.

 

그는 앗수르와 시리아(수리아)의 경계를

유프라테 강반인 카르케미시(성경;갈그미스)의 나루를 점령하고,

시리아(수리아) 일대를 애굽의 세력범위에 넣으려는 야심에 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시야왕은, 나아가 바벨론군에 호응하고,

느고(네코)에 반항하여 애굽군을 므깃도에서 격격하려다가,

불행하게도 전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흥의 업,

중도로서 실패하고,

이로부터 유다의 멸망은 시작한 것이다.

 

그에 대신하여 왕이 된 여호아하스는, 악한 무능한 왕이었다.

그는 곧 애굽 왕에 의해 폐위되고,

여호와김이 세워졌다.

 

그는 역시 악한 왕이어서,

하나님에게도 시세에도 거슬리고,

바벨론에 내통하여 이에 신복하고,

얼마 아니하여 또 배반하고,

마침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다음으로 세워진 여호야긴 또는 암우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3개월로 바벨왕에게 공격되어,

백성과 함께 이방으로 사로잡혀 이송되었다.

 

최후로 예루살렘에서 왕이었던 시드기야 역시 악하여,

마침내 그의 치세 제 11년에 최후의 몰락이 도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대외관계를 가진 유다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실로 지난(持難)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여 남북에 있는 양 강국 사이에 자기 방침을 정해야 할 것인가?

 

이는 실로 유다의 독립에 관계된 최대 문제였다.

이때에 있어서, 국내의 세론은,

바벨론에 의뢰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벨론파와,

이집트(애굽)에 추종해야 한다는 이집트파로 분열하여,

그들은 언제나 서로 반목하여 다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유다국이 취해야 할 유일한 정당한 방침을

가르치려한 이가 이사야, 예레미야의 두 예언자였다.

 

그들의 주장하는 바는 극히 간단명료했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민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의뢰할 것 아니다.

이집트(애굽)에도 의뢰할 것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의 백성 아닌가?

우리가 의뢰할 바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신가?

 

우리는 다만 여호와께만 귀향하고,

이들 양국의 분쟁 위에 초연하여 안연 신성한 독립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그런데 왕들도, 백성도, 이 말씀에 순종치 않고,

혹은 바벨론에 의뢰하며, 혹은 이집트에 내통했다.

 

그리고 국내에 통일된 근본 방침 없어,

나라의 멸망은 차츰 분명해졌다.

 

특히 예레미야 때에 이르러서는, 유다는 아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동안 그는 홀로 서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외쳤다.

 

그는 최후로,

부득한 정략으로서 바벨론에 복종해야 할 것을 권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이집트 파에서 국적(國賊)으로 박해되었다.

 

누가 예레미야처럼 애국의 지성에 불타는 자랴!

더구나 유다 국인 중에 1인의 동지도 발견치 못하고,

백성은 그를 국적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와도, 목백도, 제사장도, 백성도,

조금도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이런 상태를 계속하는 유다의 멸망은,

이제는 불을 보는 것보다도 분명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애국자 예레미야의 심중은 실로 견디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아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는, 수없이 그의 심장에서 나온 비통한 외침이었으리라.

그는 모든 힘을 다하여 회개를 권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은, 전혀 무익하게 끝났다.

 

그의 가장 간절한 기도와 희망에 반하여,

역사는 멸망에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예레미야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형벌의 날이 와서,

황폐해진 도서의 모습이 분명하게 비추었던 것이다.

 

아아, 내 창자여(뱃속아), 내 창자여,

아픔이 마음속에 미치고, 내 가슴이 고동치는도다.

내가 잠잠 할 수 없도다.

내 영혼(심령)아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아우성 소리를 듣는 도다.

패망에 패망의 소식 있도다,

이 땅은 모두 황폐 해지고,

내 장막은 졸지에 파괴되며,

내 휘장은 순식간에 찢어 졌도다’(예레미야서 4:19-20 일역)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