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성소(聖召)
예레미야서 1장 4-10절 : 그때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배 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너를 민족들을 향한 대언자로 세웠노라, 하시기에
6) 그때에 내가 이르되, 아, 주 하나님이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수 없나이다, 하니라.
7) 그러나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나는 아이니이다,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보낼 모든 자에게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건져 내리니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가 말하노라, 하시고
9) 그때에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미사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이 날 너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워 그것들을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며 파멸시키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언자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정에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근읍 아나돗 땅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때는, 유다국 멸망에 앞서기 약 60여년,
실로 내외다난의 때였다.
이때, 그는 나이 아직 겨우 20,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이 다난한 시대에 대처해야 하게끔 어쩔 수 없이 되었던 것이다.
1장 4절 이하는, 그의 성소를 남긴 가장 유명한 기록이다.
그는 이때, 또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소를 입었다.
오늘날의 말로서 이것을 한다면,
이는 그가 하나님의 예언자여야 할 취임식이었다.
물론 이보다 이전에 있어서도, 그는 깊이 하나님과 사귀고,
자기 미래의 사명에 관해서도, 또 어떤 예감을 가졌던 것이리라.
그렇지만 그는 이때 비로소
어떤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실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가 하나님께 택함 받은 그릇임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여 이 대임을 받았던가?
보라, 지금 만국위에 세워져야할 예언자,
그는 아직 겨우 20세 전후의 1 청년이다.
부르시는 이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가 받아야할 직분은, 만국의 운명에 관계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다만 예레미야와 하나님뿐,
장엄 성대한 의식이 있는 것 아니고,
문무백관이 참렬한 것 아니며,
대승정, 대 감독의 입회 있음 아니라,
그는 다만 홀로 여호와 하나님께 향하여 서서,
이 대명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 취임식인가?
하지만, 그 의미의 심원함,
그 사실의 중대함,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로 놀랍기만 하다.
20세의 청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1:10 한글 개역)할
권능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다 한 나라뿐 아니라,
만국의 흥패까지도 예언해야 할 명을 받았던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실로 언어도단인 것이다.
광기인가? 망상인가?
문제는 사실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과, 그의 생애와 인물과,
그리고 세계 역사는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먼저 이 절대한 사명을 받은 때의 예레미야의 심사를 보라.
거기 가장 인정의 발로가 보인다.
그는 과대망상광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도저히 그러한 중임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님을 잘 자각하고 있었다.
자기의 나이와 경험과 신앙이
이 직분에 대하여 너무나 무력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향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 한글 개역)
이는 그의 마음에서 솟은 가장 자연스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말이야 말로,
예레미야의 인간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가 결코 자기 힘을 과신하고,
함부로 망상에 골몰하는 인물이 아니라
아주 상식과 겸양을 갖춘 사람다운 이었음을 증거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여호와의 뜻은 움직이는 일없이,
다시 그 말씀은,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너는 나는 아이입니다고 하지 말라’(1:7 일역)고.
하나님은 충분히 그의 주저함이 당연한 것임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 공포와 주저에 이겨야 할 이유를 보여 주셨다.
즉 예레미야가 자기 힘으로 이 대임을 감당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를 보내고,
그가 말해야 할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다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서,
그 명하시는 바를 말하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일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힘으로써 그와 함께 하고,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그는 비로소 신앙의 반석(바위)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온전히 하나님께 강권되어
어쩔 수 없이, 마침내 일어나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그 임무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에 또한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와의 구별이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여,
그 부르심을 받아, 도저히 자기가 그 그릇이 아님을 자각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이것을 사양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하나님께 강요되어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술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거짓 예언자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나야말로 참된 예언자,
나는 이것으로서 서고, 나라를 구원하며,
세상을 고치려 하고, 나로 말미암고서는
사회도 국민도 개혁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무리들이다.
이 사실은 단지 예레미야 한 사람의 경우에 한하지 않는다.
출애굽기 3장 4장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성소
이사야서 6장에 있어서의 예언자 이사야의 경우,
또 사도 바울의 전도의 동기 등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참된 예언자였음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던 때,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의 구제를 명함 받았다.
그런데 그는 도저히 자기가 그 그릇될 수 없음을 알아,
수차 이를 거절했다.
‘나는 어떠한 자오니이까’고.
이사야도 역시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여호와, 만군의 왕을 뵈옵고,
자기의 부정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하나님께 강요되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하고,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서,
하나님이 예언자로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참된 예언자는 모두 그렇게 해서 섰다.
물론 하나님의 명을 마다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를 물리치고, 거절하는 때는,
도리어 하나님의 노를 초래한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서 받는 최대의 영애와 행복을 방기하고,
드디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후회를 자초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을 때,
누구나 자기의 부정과 무력을 안다.
하지만 그때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만사를 맡기고,
우리는 뜻을 결정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와의 사이에 행해진 교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예레미야 한 사람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모든 예언자, 또 사도, 또는 복음의 역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성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참된 크리스천은,
누구나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즉 일생애의 어떤 때,
다만 혼자서 하나님 앞에 불러낸바 되어,
자기의 태도를 결정하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그 방법과 경우와 사명은 다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가지이다.
그때, 누구나 단연 결의하여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상으로 출현된 모든 성도들은 모두 한 번,
이 신성하고, 엄숙한 하나님과의 교섭을 행한 사람들이다.
이것 없이 참된 생애는 없다.
문제는 인물의 대소능력의 다과,
사명의 고하(高下)는 아니다.
다만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으로 받은 성소에 응하느냐 아니냐이다.
최후로 예정문제에 대하여 일언할 필요가 있다.
예레미야의 신앙에 의하면, 그의 예언자 됨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
즉,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1:5 한글 개역)고.
그가 예언자 됨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소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는 신앙이다.
이것은 역사상 신학상의 대문제로서 이것을 주장하는 자,
반대하는 자, 그 논쟁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치지 않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이 예정의 교의는,
성서가 분명히 주장하는 가르침이며,
또 우리 신자의 실험(체험)에 비추어 보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신앙이다.
그러나 이제 그 대문제의 논쟁은 별도로 하고,
조금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때는, 이는 결코 불합리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예레미야가 아직 모태에 지어지기 전에,
그가 예언자여야 할 것이 미리 하나님의 뜻 안에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미켈란젤로(5권 284 참조)가
한 덩어리의 대리석 앞에 선 때,
이미 사전에 만들어질 모세,
또는 다윗상의 이상이 그의 심중에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조각가에 있어서 이미 그렇다.
하물며 천지만물이 창조자이신 전능자의 뜻 가운데,
드디어 만들어져야 할 예언자의 모습이 선재했음은,
실로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듯 예정의 신앙은 결코 믿기 어려운 교의가 아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로 되는 것이다.
이 신앙이 있기에만이,
신앙 약한 우리도 분기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 있을 때, 비로소 인생에 의미가 있다.
즉, 우리는 우연하게, 목적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것은, 미리 하나님의 정하신 큰 계획의 결과이며,
따라서 우리 생애는, 어떤 명확한 목적을 이룩해야 할 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해변의 가는 모래 한 알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개인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직무를 수행할 자는 달리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의 일부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만큼 조화는 온전치 못하다.
우리는 기어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목적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적,
또는 의의이다.
더구나 우리만이 아니다.
누구나가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신앙을 가질 때,
누구나가 진지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릇의 대소는 아니다.
사명의 고하는 아니다.
요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응하는데 있다.
물론 우리들은,
그릇이 가능한 한 완전하기를 애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소에 응하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귀하게,
어떤 그릇을 천하게 만드신다.
이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은 각자의 그릇 따라, 그 일을 맡기신다.
그릇된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책임을 지시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바울이 말한 대로,
청지기(맡은 자)가 자기의 일에 충실하는 것이다(고린도 전서 4:5).
우리들도 역시 우리에게 정해진 사명 따라,
생애를 통하여,
충실하게 이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촌감삼의 글 (석원병영필기)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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