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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거듭난 삶 2022. 8. 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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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제 1

 

예레미야서 111-14: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아몬드나무 막대기를 보나이다, 하매

12) 이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내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내 말을 재촉하리라, 하시니라.

13) 주의 말씀이 두 번째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기에 내가 이르되, 내가 끓는 가마솥을 보는데 그것의 표면이 북쪽을 향하고 있나이다, 하니

14) 그때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북쪽에서 재앙이 일어나 그 땅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갑자기 임하리라.

 

 

예레미야는 나이 약 20의 젊은 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만국의 예언자여야 할 성지(聖志)를 받았다.

 

그러한 대임을 받고, 그는 스스로 돌아보아,

도저히 스스로 그 그릇이 아님을 느꼈다.

그는 전적으로 이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답은 명백했다.

 

너는 자기 힘으로 예언자 되는 것 아니라,

너는 다만 하나님의 명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을 지키고, 이것을 행하며,

이것으로써 만국을 심판함은,

하나님 그 자신의 권능(대능)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득불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가 이 성소를 받자,

곧 두 가지 이상이 계시되었다.

 

살구나무가지끓는 가마가 즉 그것이다.

 

이 묵시는,

그에게 예언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예언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이것에 의해,

예언의 성질에 관한 하나님의 실물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예언자는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가,

그 방법에 대하여 일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예언자의 특별한 심리에 속한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쉽게 우리가 독단함을 허용치 않는다.

 

혹은 일종의 무아상태에 있어서,

더구나 꿈에 있어서처럼 전연 자각을 잃지 않고서,

보인 것이리라.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고,

사실 많은 의견이 제출 되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어는 것이래도 좋은 것이다.

또 예언자에 의해서도 각이 하리라.

 

요는, 다만 그것이 참된 예언이면 좋은 것이다.

단 여기서 주님의 묵시를 받은 것이고,

이는 단순한 인간의 마음의 작용,

또는 자기의 추리라든가 이상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참 예언은 언제나 도의 때 따라,

진리에 합하는 것으로서,

그 진위도 그 예언에 관한 후세의 사실의 재결로서 정해지는 것이다.

 

각설하고,

예레미야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그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것이 꿈에 있어서인지,

혹은 일종의 무아상태에 있어서였을지.

혹은 설제로 천연물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 되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예레미야는 아마도

정원, 또는 야외에서, 실제로 살구나무를 목전에 본 것이리라.

 

또 끓어오르는 가마(냄비)를 보고,

그 뚜껑의 증기가 북에서 몰아쳐 오는 사실을 목격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천연적 사실 중에,

하나님의 묵시로 말미암는 명백한 예언의 의미를 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처럼 그의 묵시를 설명하는 것은,

그 예언의 확실성에 조금도 변동을 주는 것 아니다.

또 그가 말하려는 진리 그것을 조금이라도 해치는 것 아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대명이 내린 뒤,

그는 어떤 날, 발을 호외로 옮겼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유다국 또는 만국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명의 무거움에 눌렸다.

 

말할 친구 없고, 호소할 스승 없이,

다만 홀로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서 인적 없는 곳을 소요했던 것이리라.

 

때는 엄동이 아직 다가버리지 않고,

나뭇가지의 끝은 말라, 백화 모두 굳게 동면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의 눈에 띈 것은 살구나무의 작은 가지였다.

이것을 보고, 젊은 예언자의 영안에는

똑똑하게 하나님의 뜻이 읽혀졌던 것이다.

 

살구나무는 일본의 매화처럼,

봄이 아직 이르기 전에 백화에 앞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학에 있어서는,

이것을 샤케드(잠깸의 꽃)라 부르고 있었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그는 곧 대답했다.

 

샤케드의 가지를 봅니다.’라고.

 

그렇다. 하나님은 깨어 계시면서,

그의 말씀을 행하신다고.

 

예레미야는 여기서 예언의 성질을 알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잠시 행해지지 않는대도 겁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깨어 계시사,

반드시 속히 이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 심판은 의외로 빨리 행해진다.

그러므로 가령 잠시 예레미야의 예언이 행해지지 않는대도,

결코 이에 실망할 것 아니다.

 

이 묵시는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실로 중요한

또 가장 적절한 가르치심이었다.

왜냐하면,

예언자의 생애에 있어서,

그 예언이 적중되지 않아 종종 세상의 조롱꺼리로 되고,

또 자기를 돌보아 자기 예언이

혹은 빈말(공언)이나 아닐지 하는 불안과 실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있어서 그런 묵시는 실로 커다란 힘을 주는 것이다.

예언자 하박국 같은 이도,

역시 그같이 여호와의 묵시를 받아, 평안을 얻었던 것이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하박국서 2:3-)

 

예레미야 못되는 예레미야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 소예언자의 직무(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 그리스도신자에게고 하나님의 말씀이 명해진다.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량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고,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물론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 불신의 이 세상은,

좀처럼 우리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우리들의 증명을 조소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언제나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이 세상의 지혜와 다르고,

언제나 독창적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형식과 습관으로써 행하는 이 세상은,

쉽게 그 독창적인 말을 듣지 않고,

다만 자기의 좋아하는 안이한 인습에 잠겨,

도리어 예언자를 배척하는 것이다.

 

크리스천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 참된 예언자이다.

그도 또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증오하고,

또 우리들의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때로 우리들의 예언이 맞지 않고서 복음의 진리가 곧 행해지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힘 다해 우리들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다.

이때가 그리스도 신자의 고통스러운 때이다.

 

특히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대표하여 국민의 운명에 관한 대 예언을 말한 때에,

때로 그 말이 적중되지 않고,

예언은 성취되지 않는 때의 책임과 고통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그러한 지난한 직분에 취임하기에 앞서,

여호와로부터 이 귀한 예언의 제 1교훈을 받은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살구나무의 묵시에 의해,

예언의 성질에 관한 중대한 가르치심을 배웠다.

이것은 물론 예레미야에 한하지 않고,

모든 예언자, 또는 성도에게 공통하는 예언의 성질이다.

 

그러나 둘째로 그에게 보인 묵시는,

이것과 달라, 예레미야에게 특히 명해진 예언의 제목이었다.

 

즉 그가 본 끊는 가마(),

하나님의 노하심을 보이며,

그 뚜껑(:마개)의 연기(증기)가 북에서 남으로 향함은,

하나님의 형벌이 임할 바 방향을 보여준 것이다.

 

즉 하나님은 배반한 유다를 벌하시기 위해,

북방의 백성을 일으켜 그들을 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가마(;남비)는 유다인의 보통가구이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선민의 불의를 보고,

마음을 아프게 한 애국적 예언자의 눈에는,

이 평범한 보통 가구에 있어서도,

조국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이다.

 

재앙(환난)은 북에서 오려한다.

하나님은 배반한 백성을 벌하시려 한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거의 생애를 통하여 이 예언에 집중하여 있었다.

 

그러나 백성은, 물론 그러한 예언을 믿지 않았다.

뿐더러 만약 재난이 온다면,

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남방 이집트(애굽)에서이다.

 

아라비아의 사막을 사이에 두고

멀리 바벨론에서 외적이 습래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았다.

화는 쉽게 북에서 오리라는 예언을 외쳐 일관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말은 얼마 동안,

2030년 행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도 마침내는 그의 말대로 유다는 멸망했다.

40년 기다려서,

그의 예언은 문자대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래 이 두 가지의 묵시는

예레미야의 생애의 중심적 사실로 되었다.

 

그에게 일어난 많은 사건은,

이 두 가지 묵시로서 설명 할 수가 있다.

그의 생애는 실로 간단명료했다.

그는 일생에 같은 것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

이것이 그의 생애의 사업이었다.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