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제 5장 해석
예레미야서 5장 1-31절
이 장은 대체로, 전장(前場)의 계속이다.
전장에서 예레미야는,
유다가 북에서 올 재화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나 그 북방의 백성 스구디아인은 종내 유다에 침입치 않고 재화의 폭풍은 지나가,
예레미야의 예언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조금도 예언을 폐하는 일없이,
최후까지 백성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와 유다의 멸망을 부르짖어 마지않았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한 때 잠시 성취되지 않았지만도,
드디어 그 말이 문자대로 되어,
예루살렘은 망하여 황지로 되고,
백성은 혹은 피살, 또는 먼 나라로
포로 되어 가는 운명을 맛봄의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5:1 한글 개역)고 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의로운 형벌이 임할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중에서 하나님의 사하심을 청할 이유를 발견하고자 애썼다.
가령 소수일지라도, 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공의를 행하는 자가 있을까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어긋났다.
그들은 ‘여호와는 살아계시도다’라고 하며 입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말한대도,
실은 거짓이었다.
성실을 돌보시는 하나님 앞에는,
그러한 것은 전혀 무익한 일이다.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였다(5:2-3)는 것이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도 미련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은,
그들이 모두 비열한 민중이기 때문이 아닌 가고.
그러므로 그는 다시 눈을 옮겨
신분 천하지 않은 상류 귀족계급을 보았다.
거기에는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 자가 있지나 않는 가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헛된 희망이었다.
그들도 또 모두 하나님의 멍에를 꺾고
여호와의 결박(줄)을 끊고서 그릇된 길로 행하는 자였다. (5:4-5)
결국 예레미야는 귀천상하를 통하여,
그 어디서도 한 사람의 진정 여호와를 경외하고 정의를 행하는 자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옛날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고 나오던 때,
아브라함은 소돔 백성 위해 하나님께 청하여,
만약 거기에 50인, 혹은 30인, 혹은 20인, 혹은 10인의 의인이 있으면,
그로 인하여 소돔을 사하시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소돔에는 결국 그 10인의 의인을 발견할 수 없어,
그 성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황과 불로 인하여 소멸되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이 예루살렘 도성에 대하여,
도저히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은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 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5:6-한글 개역)라고.
혹은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 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5:9; 5:29)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5:14 한글 역)고.
그리하여 예레미야의 말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의 앞에는 다만 암흑이 가로 놓여 있었다.
다만 그 캄캄한 중에, 유일한 빛을 던지는 것은 10절, 18절이다.
‘하지만 그 때 내가 너희를 멸하지는 않으리라고, 여호와 말씀하시는 도다’(5:8 일역)
이 말씀만이 캄캄한 절망의 밤에 희망의 빛으로서 빛나는 것이다.
* 참조 : (이사야서 6:13 그러나 그 땅 안에 여전히 십분의 일이 남을 것이요, 그것이 돌아와서 먹을 것이 되리라. 보리수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자기 잎을 떨어뜨려도 그것들의 본체는 그것들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이 그 거룩한 씨가 그것의 본체가 되리라, 하시더라).
예레미야의 이들 말을 읽고서,
우리는 이것을 극단적이라고 하여 물리치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도 없도다’(5:1 한글 역 참조)라고.
너무나도 체념한 극단의 말인 듯이 들린다.
그러나 조용히 이것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가령 예루살렘이
오늘의 우리나라의 도쿄라든가, 오사까라든가
삿뽀로(1권 106 혹까이도 참조) 등지에 와서
본 일을 상상한다면 이는 결코 과격하지도 않고,
과장도 아니라, 가장 사실의 진상을 통찰한 선고임을 아는 것이다.
물론, 우리 같은 자가 이것을 봄이 아니다.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결케 하시고,
택하여, 파송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한 성결한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
과연 우리는 한 사람이라고 참으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이들 도시에서 발견될 수 있달 수 있을지?
어디에 그러한 사람이 있는가?
노동자 중엔가? 관리들 가운덴가?
상인 중엔가? 학자, 귀족 중에서 일까?
또는 히비야에 군집하는 많은 정치가 중에서일까?
또는 교회, 그 감독, 목사 중에서일까?
아니, 아니,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여 볼 때,
예레미야의 이 말은 결코 사실을 그르치지 않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에는 적어도 예레미야가 있었다.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는, 그도 없는 것이다.
의인 한 사람도 없다고 하여
여호와의 진노로써 백성을 책망한 예레미야를 가진 유다는,
그 점에 있어서, 우리나라 보다 얼마나 나은지 알길 없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무종교의 민중이다.
그 민중에 선거된 정치가이다.
그 정치가에게 지배되는 국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상하를 통하여,
악에서 악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백성이 만약 여호와의 진노에 의해 진멸된대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예레미야는 또 우리들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내 백성 중에 악인 있도다.
그물을 치는 자 같이 매복하여,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도다.
조롱에 새가 가득함 같이 불의의 재물, 그들의 집에 가득하도다.
이르므로 그들은 큰 자로 되고 부한 자로 되도다.
그들은 살찌고 광택 있도다.
그 악행은 심하도다’(5:26-27 일역)고.
매일의 신문지에 의해 보도되는
우리나라 오늘의 현상이 가장 적절하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 대하여 한 사람의 의분을 발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 나서서 이러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고하고,
그 형벌을 경고하는 자가 없다.
누구도 그들의 죄를 책망하여,
그 양심에 정의를 회복케 하려고 기도하는 자가 없다.
하나님의 종이어야 할 신자 사이에서 조차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일찍이는 영국에 있어서
그러한 열렬한 외침을 백성들 사이에서 들을 수가 있었던,
옛 청교도(퓨리탄 1권 251주)의 미국에 있어서 이것이 있었다.
그 때에는, 나라의 기초는 강고함을 얻었다.
그 사회는 비교적으로 깨끗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미에 있어서도,
이것을 들을 수는 없다.
지금은 타협, 간음의 세상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세력을 쓰는 자는,
소위 거짓 예언자, 거짓 교사이다.
그들은 불의한 백성의 마음에 영합하기 위해 거짓 예언하고,
제사장 또는 그들의 말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백성은 또 그러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5:31 대언자들은 거짓으로 대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방법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것의 마지막에는 너희가 무엇을 하려느냐?).
거짓 예언자와, 거짓 제사장과,
거짓 국민과. 이에 이르러서 나라는 벌써 멸망했던 것이다.
나라를 해독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이다.
그리고 거짓된 신자이다.
그들은 공동하여,
실로 나라를 해독하고,
백성을 문란케 하며,
땅을 황폐케 하는 아주 심한 자이다.
오늘의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떤가?
거짓 예언자란 누구인가?
거짓 제사장이란 누구인가?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고서,
이 세상의 권자, 부자에게 의뢰하며,
그들을 특히 존대하고,
그들을 그 교회에 끌어들여,
그들의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반대를 두려워하고,
전심으로 그들의 감심을 얻기 위해
조금도, 그들에게 죄의 회개를 말하지 않으며,
진리의 빛을 언제나 가리고,
다만 사회봉사를 말 할 뿐 아닌가?
‘이 땅에 놀랄 바 가증이 여길 일이 행해지도다.
예언자는 거짓 예언하고 제사장은 그들의 손에 의해 다스려지도다.
그리고 내 백성은 그것을 (사랑)좋아하도다.
그러면 너희는 결국 무엇을 할려는가’(5:30-31 일역)
이것은 예레미야의 말이다.
거짓 교사와, 거짓 목사와, 거짓 신자와,
이들 셋이 일치함으로써,
교회는 퇴락하고,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교사만의 죄이다.
백성이 거짓 교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촌감삼의 (석원병영필기)를 참조.
'Edengol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1) | 2022.09.20 |
---|---|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로 황무케 하여 (1) | 2022.09.19 |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1) | 2022.09.17 |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이 내게 심히 패역하였느니라 (1) | 2022.09.16 |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0) | 2022.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