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거듭난 삶 2022. 9. 2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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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악에 대한 책망

 

성 경: [6:9-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땀 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6:9]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땀 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 침략해 들어오는

갈대아인들에게 예루살렘 점령 이후 포로로 잡혀 가고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마저 잡아가라는 권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크게 뉘우쳐야 할 것인데,

이들 조차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확 할 때 남김없이 거둬들이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두라고 명하셨으나,

 

(19:10 네 포도원에 떨어진 포도를 줍지 말고 네 포도원의 포도를 다 따지 말며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하여 남겨 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24:21 네가 포도원의 포도를 거둔 뒤에 나중에 그 남은 것을 주워 모으지 말지니 그것은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위한 것이 되리라),

 

당시 유다인들은 탐욕에 이끌려 이러한 규례를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절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죄악들을

장차 받게 될 심판과 연관시켜 언급하고 계신 셈이다.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 이는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완고하게 거부하였음을 가리킨다.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다'(아렐라)는 표현은 다소 생소하다.

 

다른 곳에서는 입술의 할례나

 

(6:12 모세가 주 앞에서 아뢰어 이르되, 보소서,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파라오가 내 말을 들으리이까?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입술을 가진 자니이다, 하매,

 

30 모세가 주 앞에서 아뢰되, 보소서,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입술을 가진 자이온대 파라오가 어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리이까? 하였더라)

 

마음의 할례란 표현이 쓰이고 있다.

 

(26: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닫혀있는 귀에는 그 어떤 훈계나 가르침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6: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 예레이먀의 전인격은

여호와의 계시를 온전히 수용하는 편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의 분노에 항의하거나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는 유다에 임할 심판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클라크(Clarke)는 이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유다에 임할 무섭고 끔찍한 심판의 광경을

예레미야에게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이 예언을

힘써 전하기 위해 뜨겁게 불타올라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6: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 유다인들의 모든 소유가

타인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손을 그들에게 펴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자신들을 쫓아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모세가 경고한 바이기도 하였다.

 

(28:30 이하 네가 아내와 정혼하나 다른 사람이 그녀와 함께 누우며 네가 집을 건축하나 그 안에 거하지 못하고 네가 포도원을 세우나 포도를 거두지 못하며).

 

 

 

[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 이 백성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탐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군다나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작은 자''선지자'가 대구를 이루고 있고,

'큰 자''제사장'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지자가 제사장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모든 성직자를 다 포괄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J.Bright, Thompson).

 

그리고 탐남으로 번역된 원어는 '바차'인데,

끝부분의 거짓과 대칭을 이루며, 이와 유사한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가 어떤 경우에는 '이득을 얻다'란 의미로 쓰일때도 있지만,

대체로 '부당한 이익을 탐하다', '탐심에 빠지다'는 뜻으로 쓰였다.

 

 

 

[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 백성들의 상태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는데도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평강만을 외쳤다.

여호와와 백성 간의 언약 관계는 파괴되어 심판이 목전에 다달았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허황된 빈 말로써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였다.

 

한편 심상히(네칼라)란 말은

원래 '무가치한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란 뜻인데,

 

70인역(LXX)은 이를 '여수데눈테스'라고 번역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경멸하며'로 해석하였다.

 

심각한 상처에 대한 경각심 없이

이렇게 처치한다는 것은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을 속이고 사기치는 더러운 행위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얼굴을 붉히는 법도 알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민족 전체가 잠겨 있는 그 악행에 대해 완전히 감각을 잃고 말았다.

 

더욱이 그들은 단순히 무감각한 정도가 아니라

악을 향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와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저들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의식 준수만으로도

항구적인 평화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Thompson, Harrison).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조들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았던 것을 가리킨다.

 

(4:4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 중에서 가져왔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5: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6:8-9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12:4 이처럼 아브람이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나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러나 당시 유다의 상황은 그들이 지난날 걸어온 행적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데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안식과 번영의 길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멸망과 죄악의 길을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