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2
성 경: [렘 20:13-18]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렘 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 본절은
예레미야의 깊은 내적 고백이라는 문맥상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고
또 본 단락의 분위기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에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후대에 삽입된 찬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애가들도 종종 본문과 같은
신앙과 믿음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결론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 6:8-9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서 떠날지어다. 주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9) 주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나니 주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더군다나 본절의 용어는 예레미야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행악자의 손에서'란 표현은 15:21과 21:12 그리고 23:14 등에서도 나타나며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다'란 표현은 이곳과 23:14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표현은 본서 외에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다.
한편, '가난한 자'(에비욘)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빈곤에 처한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신앙이 돈독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적으로 가난한 경건 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해자의 위협을 받는 시련의 때에 한 사람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결코 재산이나 부가 아니라 영적 힘인 것이다.
[렘 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 여기서 예레미야의 갈등과 고뇌가
극한에 치닫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낳아준 것에 대해 탄식한 때도 있었다.
(15:10 내 어머니여, 내게 화가 있나이다! 어머니께서 나를 낳되 온 땅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요 다투는 자로 낳았나이다. 내가 이자를 받으려고 빌려 주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이자를 받으려고 내게 빌려 주지도 아니하였으나 그들이 다 나를 저주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이나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범법 행위였다.
(레 20:9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그에게 돌아가리라;
24:10-16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로서 아버지는 이집트 사람인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나갔는데 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과 한 이스라엘 사람이 진영에서 서로 싸우다가
11)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여 저주하므로 그들이 그를 끌고 모세에게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단 지파에 속한 디브리의 딸 슬로밋이더라.)
12) 그들이 그를 감금하고 주의 생각을 알고자 하더라.
13)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4) 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낸 뒤에 그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는 자기 죄를 담당할 것이요,
16)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반드시 돌로 그를 칠지니라. 타국인이든지 그 땅에서 태어난 자든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본절에서 선지자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저주와
원망은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실과 그가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5 내가 너를 배 속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거룩히 구별하였으며 너를 민족들을 향한 대언자로 세웠노라, 하시기에).
한편, 소망과 믿음의 고백(11-13절)에 이어
곧바로 이처럼 침울하고 절망적인 탄식이 토로되는 것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구문의 위치 변경이 가해졌다고 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절 이하가 바스훌의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 견해들은 지나친 추측에 근거하였을 뿐이다.
우리는 당시 예레미야가 직면했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고려할 때,
이처럼 갑작스런 심리 상태의 전환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Myers).
[렘 20: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 예레미야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하지 않고
(부모를 저주하는 이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인 출 21:17 참조)
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해 준 그 사람에게 저주를 돌리고 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네가 생남하였다"라고 알려주었는데,
여기서 '아들'에 해당하는 '벤'은 때때로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만 '아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본절에서는 아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카르',
즉 '남자 아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스라엘 남자에게 있어서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통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딸들도 유산 상속에 참여하긴 했지만,
(민 27:8 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너희는 그의 상속 재산이 그의 딸에게 돌아가게 할 것이요),
그래도 가문의 머리는 남자였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아버자가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였을것이 당연하다.
[렘 20: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 이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뒤집어 엎으신 성읍'들로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평원에 있던 다른 성읍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Brigh, Thompson).
(23:14 또 내가 예루살렘의 대언자들에게서도 무서운 일을 보았노라. 그들은 간음을 행하고 거짓 속에서 걸으며 또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아무도 자기의 사악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게 하나니 그들이 곧 그들 모두가 내게는 소돔 같으며 그것의 거주민들은 고모라 같으니라;
창 19:24-28 주께서 하늘에서 주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 그 도시들과 온 평야와 그 도시들의 모든 거주민과 땅 위에서 자라난 것을 엎어 멸하셨더라.
26) 그러나 롯의 아내는 그의 뒤에서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평야의 온 땅 쪽을 쳐다보고 바라보니, 보라, 그 지방의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처럼 치솟더라;
사 1:9 만군의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주 소수의 남은 자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되었으리로다)
예레미야는 극에 달한 낙심과 고뇌 가운데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한 자에게 소돔과 고모라에게 임했던
저주와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사람에게 실제로 저주를 퍼붓고 싶어한다는 식의
문자적 해석을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차라리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렬한 어조의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렘 20: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 이런 표현들은
특정 대상에 대해 실제적으로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포자기적 고통을 나타내기 위한 다분히 문학적 기교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절망이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렘 20: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 어찌하여 내가 태어서 나와서 - 이 구절은 예레미야의
고뇌의 시의 결론에 이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였던 자로서
어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심각한 탄식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이런 비탄의 부르짖음과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해 아무런 용담도 주시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당신의 약속과 뜻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회복하기를
침묵함으로써 기다리고자 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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