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폴크스바겐의 전후(戰後) 1대 사장에 취임한 하인리히 노르트호프는 폴크스바겐을 재건키로 한 영국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영국군을 설득해 폐허가 된 공장을 재가동하고 노르트호프를 사장으로 임명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 왕립공병단의 아이번 허스트 소령이었기 때문이다.
- ▲ 아이번 허스트.
그는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이 타고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는 차를 원했다. 히틀러는 국민차 개발 및 보급을 위해 1937년 폴크스바겐을 설립, 하노버와 베를린 사이에 도시를 세우고 자동차 공장을 짓는다. 이 도시는 현재 폴크스바겐 본사가 있는 볼프스부르크(Wolfsburg)다. 이곳에서는 훗날 2200만대나 팔린 딱정벌레차 '비틀' 시제품이 제작됐다. 1939년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비틀은 다목적 군용차로 개량돼 전장에 투입된다.
허스트는 대학 졸업 후 웰링턴 백작 연대 소속의 장교로 유럽대륙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 일원으로 독일군과 싸웠다. 독일의 패색이 짙던 1945년 4월, 폴크스바겐 공장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파됐고 같은 달 30일 히틀러는 자살했다.
이후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됐는데, 29살의 허스트 소령은 독일 근무를 자원해 폴크스바겐 공장 책임자로 파견된다. 그는 처음에 이 공장을 군 정비소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폐허 속에서 발견된 비틀 시제품들은 영국 장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허스트 소령은 여기서 회사의 재건 가능성을 발견, 영국군이 비틀 2만대를 군용으로 구입해 사용하도록 설득했다. 2차대전 때 비틀을 개조한 군용차들의 뛰어난 성능을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곧 주문량을 늘렸고, 1946년엔 월 1000대의 비틀이 생산됐다.
- ▲ 1946년 폴크스바겐 비틀의 1000번째 차량 출고식. 운전석에 허스트가 타고 있다.
다행히 대세는 허스트 소령 편이었다. 2차대전 후 독일의 공업화를 금지하던 모건타우 계획은 유럽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공업화를 허용하는 마샬플랜으로 교체됐다. 1948년 폴크스바겐은 서독의 연방정부와 니더작센주에 귀속되고, 허스트 소령은 전후 폴크스바겐의 첫 사장으로 노르트호프를 임명한다. 허스트가 폴크스바겐을 떠나 파리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자리를 옮기던 1949년 폴크스바겐은 이미 독일 최대 자동차 회사가 됐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2000년 허스트가 사망했을 때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츠그룹은 1980년대 사라졌고, 이후 롤스로이스는 BMW에, 벤틀리는 폴크스바겐에 인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