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흘린 발자취

A.D. 1400-1600년의 교회사 2

거듭난 삶 2023. 2. 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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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400-1600년의 교회사 2

 

이렇게 오랜동안을 시달려 온 침례교도들의 운명은 슬프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았고,

개혁자들까지 포함한 잔악한 박해자들 또한

아나 - 밥티스트(재 침례교도)의 뒤를 쫓고 있었다.

실로 그들이 남긴 것은 피 흘린 발자취뿐이었다.

 

 

13. 장로교도들 보다 몇 년 앞서 대륙에서가 아닌 영국에서 또 하나의 교파가 일어났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형식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종교개혁을 도운 것은 확실하지만)

가톨릭으로부터의 실제적 분리 또는 분열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는 마치 869년에 동방 카톨릭이 서방으로부터 분리하여,

희랍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 그러한 분리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분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에 이루어졌다.

 

즉 영국와 헨리 8세는 스페인의 캐더린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후 그의 마음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이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교황만이 이혼을 허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특별한 이유였으므로 교황은 그 허가를 거절하였고,

헨리는 대단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자기 자신의 의사대로 처리할

권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수상인 토마스 크롬웰이 왕에게 조언하기를

어찌하여 왕께서는 이러한 일에 교황의 권리에 복종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하였다.

 

헨리는 그의 조언에 따라 교황의 권리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영국교회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이로써 새로운 영국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1534, 1535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영국교회는 교리에 있어서는 카톨릭과 같았으며

다만 교황의 권세만을 폐기하였던 것이다.

헨리 역시 자신이 개신교인이 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가톨릭의 신앙을 가지고 죽었다.

 

 

14. 그러나 이 분리는 결국적으로 어떤 깊은 변화 또는 개혁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

내부에서 또는 교회의 권세 아래서 종교개혁을 시도했을 때에는

루터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개혁이 불가능하였으나

일단 분리한 후에는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크랜머, 라티머, 리들리와 그밖에 여러 사람들이 개혁으로 변화를 일으킨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후 몇 해가 지나 메리(피의 메리), 곧 이혼당한 캐더린의 딸이

영국의 왕위에 올라 새로운 교회를 다시 권세 아래 넣으려 하였을 때

이러한 사람들은 그러한 개혁의 대가로써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 무섭고 참혹한 반전은 메리의 피로 물든 통치 5년으로써 종말을 고하였으나

이 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메리의 피 묻은 도끼 아래 잘라져 갔으며

메리 자신의 머리도 그들과 함께 잘려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앤 볼레인(그녀 때문에 캐더린은 이혼당하였다)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을 때 영국교회는 다시

교황의 권세를 던져 버리고 재건되었던 것이다.

 

 

15. 이리하여 16세기 말까지는

다섯 개의 국가교회(세속 정부에 의하여 유지된 교회)가 있었는데,

이는 곧 로마 가톨릭과 희랍정교회, 영국교회와 루터교회 즉 독일교회,

그리고 오늘날 장로교회로 알려져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그것이다.

 

그들은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었던 사람들과 왈덴시안, 그리고 독립적인 여러 교회들,

곧 어떠한 점에서나 카톨릭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교회들의 성도들을 모두 다 심히 미워하였고 핍박하였다.

종교개혁을 위하여 싸울 때에 베풀어 주었던 그들의 큰 도움은

이미 잊어 버렸으며 또한 전혀 무시하여 버렸던 것이다.

부녀와 아이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칠 줄을 모르는 핍박 속에서 죽어갔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각성되고 고취되었던 그 위대한 소망은

피로 물든 망상이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존자들은 험준한 알프스 산속에서 피난처를 찾았었고,

다른 사람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서 그들의 은신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16. 카톨릭에서 분리하였거나 또는 거기에서 나온 이 새로운 조직체들은

그 카톨릭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치명적인 과오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성직자 제도(외형적으로는 조금씩 다름)

 

. 국가교회 (교회와 국가의 결탁)

 

. 유아세례

 

. 적수례 또는 관수례로 침례를 대신함

 

. 침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침

 

.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함(최소한 몇 세기 동안)

 

 

17. 초기에는 이러한 모든 국가 교회들이 다른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1555년 아우스그버그에서 개최되었던 종교회의에서

서로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하는

소위 아우그스버그의 평화라 알려져 있는 평화조약이 이루어졌는데

이 평화조약에 조인한 두 조직체는

한편은 가톨릭 또 다른 한편에는 루터교회였다.

 

우리에게 상관치 말라. 우리도 너희를 간섭치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카톨릭인이 루터교인들과 싸운다는 것은

곧 독일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루터 교인들이 카톨릭인들과 싸우며 그들을 박해한다는 것은

곧 가톨릭교의 우세가 모든 나라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박해는 그치지 않았다.

미움을 받았던 아나-밥디스트들은(지금은 Baptist, 침례교도라 불리운다)

그 이전의 모든 박해와 또한 오천만이라는 사람들이 이미

순교로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 무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존속되고 있었다.

 

외길로 되어 있는 30마일 가량의 유럽의 한 도로를 따라 두 서너 자의 간격으로

화형의 말뚝이 하나씩 꽂혀 있었고, 그 뾰족한 말뚝 끝마다 순교당한

재 침례교도들의 피 묻은 머리가 달렸던 것도

바로 이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간의 상상으로 이렇게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광경을 그려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더욱이 믿을 만한 역사에 의하면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19. 카톨릭은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존중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로 성경의 권위와 같이 절대적인 두 가지 것이 더 있는데,

이는 곧 교부들의 저서교회(가톨릭)의 법령

곧 절대 무오한 교황의 교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톨릭(천주교)와 개신교, 또는 카톨릭(천주교)와 침례교회 사이에는

끝까지 합의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만족할 만한 논의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20. 그러면 침례에 관한 문제 그리고 침례의 실시와 방법을 예로 들어

그들이 어떠한 최종적인 권위를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자.

 

성경은 의심할 것 없이 침례를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그 유일한 방법으로서 침수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완전무결한 교회가 그 방법을

침수례에서 적수례(물뿌림 세례)로 변경시킬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동시에 절대 무오한 교황의 권위 외에는 다른 누구도

그러한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21. 독자들은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놀라시겠지만,

필자는 이 강의에서 극히 조금밖에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단 여섯 시간의 강의 내용에서

2000년에 이르는 교회사의 중요한 골자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이 어려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22. 이제 이 무서운 세월 동안에 성경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하여

유의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기억하여 두어야 할 것은 그 당시에는 성경이 인쇄되어 있지 않았으며

설령 인쇄술이 발명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인쇄할 만한 종이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양피지 또는 염소나 양의 가죽, 그리고 파피루스(어떤 종류의 나무 제지 원료)

기록하였다.

 

필기 도구도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펜이 아니라

일종의 철필 같은 것이었으며

성경과 같은 큰 서적은 아마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운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전 세계에 성경 전권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은

30부 이상이 되지 못하였으며

대체로 마태, 누가, 마가,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 또는 서신 중의 몇 권,

그리고 요한 계시록이나 구약 중의 일부, 이렇게 몇 권씩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었던 성경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완전하게 보존되었으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경에서

복음의 핵심을 올바로 파악하고 믿고 있었다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뚜렷한 기적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오늘날 누구나 자기 모국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커다란 축복이다.

 

 

23. 성경에 관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에 대하여

특별히 고찰하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한 번 더 말씀드리는 것도 현명한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이것은 AD 1229년에 개최되었던 타울로스 공회에서 카톨릭이 자행한 일인데,

이때 그들은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

 

최근 어떤 카톨릭교도가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그렇게 한 목적은 그들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어떤 책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 백성들이 그것을 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은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람들은 심판 날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고 하셨다.

성경에 선포되어 있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경 요한복음 5:39에는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카톨릭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엄청난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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