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거듭난 삶 2023. 10. 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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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테코스테(오순절)에 된 일

 

사도행전 21-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펜테코스테’(그리스어)는 제50을 의미하는 말로서, ‘50일제

 

또는 오순절이라고 역할 수 있는, 유대의 삼대 절기의 하나이다.

구약성서의 곳곳에 칠주의 제 칠칠절’(34:22)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다.

 

유월절에서 제50일째, 7주 후에 지켜지는 축제이다.

이는 소맥의 수확제로서 그 첫 이삭을 바치는 제의(祭儀)로서,

유대 2대 절기의 하나에 해당되는 것이다.

 

너희가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애굽기 34:22)고 있다.

 

그리고 이 유다의 농제(農祭)의 이름이 특히 오늘 그리스도 교도에게 특수한

친밀감을 가지는 것은, 사도행전의 제2장의 기사에 기초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펜테코스테(오순절) 제일(祭日)에 있어서,

성령이 사도를 비롯하여 제자들 위에 임하여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에 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교국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부활제에서 제7회 째의 일요일을 펜테코스테의 날로서,

휘르선데이 즉 성령강림제일로 일컫는다.

 

사도행전을 읽고서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사도행전이라면 읽어서의 문자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行蹟)을 전하는 것으로서,

곧 역사(歷史)이다. 그리고 역사란 말할 것도 없이 외부에 나타난 사건의 기록이다.

 

즉 안에 감추인 것이 밖으로 나타나,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기에 이른 것이 역사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진리, 이상, 혹은 교리와는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다.

후자는 영구불변인데, 전자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것이다.

 

필경 영구불변인 진리는 역사의 개전의 밑바닥에 무겁게 잠겨 있는 것으로,

그것이 때와 장소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여 외부에 나타나 사적(史蹟) 사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史蹟) 사실은 언제나 동일할 수 없다.

물론 동일한 경우가 전연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부동은 오히려 상례이고 동일은 오히려 희소하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밑을 흐르는 원리의 동일을 뜻하는 말로서,

동일 사건의 반복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 기사를 영구불변의 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성령은 하나로서 영구불변인데, 성령이 신자를 통하여 일하시는 길은,

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다.

 

텐테코스테의 날의 성령강림은, 그 때와 그 경우에 그 형태로서 행해진 것으로,

이것으로서 영구불변하는 성령강림의 모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아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서, 그들이 앉아 있는 방에 가득 채웠다고 하고,

 

불꽃 같은 것이 나타나, 나뉘어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모두 이는 역사이다. 그리고 역사로서 연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불변의 형으로서 보아야 할 것은 아니다.

 

이 한 가지를 아는 것은, 성서의 사적부분을 배우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하다.

특히 성령강림의 날 같은 것을 배우는 때에 있어서는 이는 잊어서 안 될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진리를 혼동하는 이가 세상에 너무 많음은 슬픈 일이다.

 

우리들은 이 두 가지를 엄밀히 구별할 때 비로소 성서해석에 잘못됨이 없을 수 있고,

또 신앙생활에 있어서 틀림이 없을 수 있다.

 

옳다. 펜커코스테의 사건은 한번,

그리고 모름지기 한번 만 일어난 사적(史的)사실이다.

하지만 상징적으로는 2, 3의 귀중한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1불 꽃 같은 것이 나타나, 나뉘어져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3)는 한 구절이다.

 

즉 성령은 하나인데, 그것이 임하는데 있어서 나뉘어져 따로 따로 각 사람위에 부어져,

각 개인에게 다른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이른 바 리바이벌(신앙부흥 종교부흥)이라 하여, 만인을 같은 영적 환희의 상태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은, 그 얼마 아니하여 무산소실하여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그것이 불건전함을 알기에 족한 것이다.

 

참된 성령 강하는 나뉘어져 각 사람 위에 머무는 것이다.

이 점을 명시해 주고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및 14장이다.

 

은사(은혜의 선물)는 다르지만, 성령은 같고. . 혹은 성령에 의해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혹은 같은 성령에 의해 지식의 말씀을 주시고 혹은 같은 성령에 의해 신앙을 주시고 혹은 같은 성령에 의해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시고...’라고 한다.

 

성령강림이라는 중대 문제에 있어서도,

다른 문제에 있어서와 한 가지로, 바울은 우리들의 의거할 권위이다.

 

다음으로

 

이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 성령의 시키심을 따라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4절에 있는 것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이는 복음이 드디어 세계 만민에게 전해질 것을 표시한 것이다.

땅 끝까지, 산골짜기까지도

 

평화로운 것을 선포하며, 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이사야 52:7;10:15참조)의 모습을

볼 날을 예표한 것이다.

 

펜테코스테의 날에 있어서 제자들이 갑자기 여러 나라의 국어로서 말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는 견천동지의 대 기적들이다.

 

그 설명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할 수 있대도,

요컨대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못 하신 달 것은 없다.

그리고 이 기적 속에는 커다란 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은 세계 각 국민 각자의 말로서 주어지리라는 것이다.

또 나아가서는 복음을 알고 또는 다른데 전하려는 동기가,

세계 각국의 국어를 연구하려는 최대 최강의 동기로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학이라 하면 오늘날 중요한 학과인데.

이것은 원래 복음 전도를 동기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의 성서는 500 내지 600의 국어로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어떠한 책이 그렇듯 많은 번역을 가질 수 있을겐가!

 

만약 성서를 그 나라의 말로 주고 복음을 그 나라의 말로서 전하려는

동기가 없었더라면, 각 국어 연구의 동기는 극히 미약한 것으로 되리라.

 

우리 아이누(일본 북해도와 사하린에 사는 몸에 털 많은 한 종족) 인종 같은 것,

오늘 그 수 12천을 넘지 못하는 소()인종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배첼러같은 학자가 그 일생을 아이누어 연구에 바치고,

그리하여 언어학상에 대 공헌을 한 것 같은 일은, 필경 이 소인종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기타 남양제도의 여러 작은 섬들에 불과 인구 3천 내지 5천 이하 정도의

토인(土人)의 언어인데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그 언어로서 복음을 전한다.

이는 곧 복음 전도가 각 국어 연구의 최대 동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오늘의 왕성을 가져온 언어학상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공헌을

제외하는 때는, 아마도 그 최중요부를 절취하는 것으로 되리라.

 

즉 안다, 언어 연구의 원래가 복음 선전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 것임을.

 

이상과 같이 생각하는 때, 펜코스테(오순절)의 대기적은 역사이므로

동일한 모양으로는 재현되지 않는 대도, 모양을 달리하고 정신을 하나로 하여

지금까지에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펜테코스테의 그 날에 있어서 보다는

더 자연적으로 또는 보다 깊게 또는 보다 널리,

지금도 역시 일어나고, 후에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리바이벌이다.

 

펜테코스테 그대로의 리바이벌은 지금에 있어서는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내적으로 동일하고 외적으로 동일하지 않는 리바이벌은 지금도 역시

성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강하의 의의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펜테코스테의 날의 성령강하는 2대 사건을 야기했다.

 

1은 사도들이 그 때부터 복음전도자로 된 일이다.

2에클레시아, 즉 교회가 성립된 일이다.

 

()은 밖으로 향하여 복음 전파의 흥파를 일으킨 일,

()은 안으로 향하여 사랑에 있어서 일단으로 된 일 등이다.

 

즉 밖으로의 개장과 안으로의 결합, 이것이 성령강림의 직접의 결과였다.

이때 이전에도 사도들은 좋은 신자였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단지 좋은 신자임에 그치지 않고서,

안으로 충일하여 밖으로 퍼지는 신자로 되었다.

 

이전은 각자 개개 따로 따로 예수의 제자였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서로 같이하여 심령적 일가족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가지 대변동은 극히 명백하게 사도행전 제2장에 기록되어 있다.

(갑은 그 거의 전부에 걸쳐서 을은 마지막 몇 절에 있어서).

 

그러면 여기 한 문제가 생긴다.

 

그들에게 이 변화를 준 것은 무엇인가고, 그것은 물론 성령강림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는다.

 

어떠한 성령의 역사가 그렇게 했던가고, 그저 막연하게 성령강림이라든가,

단지 불꽃 같고 바람 같다고 해서는 마땅치 않다.

 

성령이 임하여 그들을 이성적으로 개도한 것이 아니어서는 이상과 같은

대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도하시는데 부모가 자식을 인도하듯이 하신다.

 

즉 우리들에게 길을 보여주시어 요해케 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 오늘까지 복잡했던 난문제가 훌륭히 해결되고,

모두가 동일 되는 때 저 이 대변동이 생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사상의 통일이 생겨나 비로소 밖의 개장, 안으로의 단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성령강림이라 하여, 이것을 감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먼저 감정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 감정의 감퇴와 함께

반드시 소산하여 버리는 것이다.

 

참된 성령강하는 오히려 지적이다.

그리고 지적 요득 위에 절로 생기는 감정이다.

 

성령은 진리를 너희에게 가르치고. . 진리의 영이 임할 때, 너희를 인도하여 모든 진리를 알게 할 것이다라고 주는 가르치셨다.

 

사도들에게 이상 이 대변동이 일어난 것은, 그 사상의 통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성서를 잘 알고,

주와 3년 생애를 함께하여 허다한 경이에 접하고,

메시야로 믿은 주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망연한 때 그 부활을 만나, 40일 그와 함께 있고,

마침내 승천하시는 것을 삼가 볼 수 있었다.

실로 얼마 안 되는 연월사이에 경심해목의 절대사에 연속적으로 접했던 것이다.

 

대 문제는 대 문제에 연속하여 그들의 심령에 밀어 닥쳐왔던 것이다.

그들이 다만 경도했을 뿐으로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망연하여 있는 그들 위에 성령이 한번 임하여,

불가해였던 일들의 의미가 모두 명료해질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독자(獨子)가 사람의 형상을 취하여 세상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오르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무엇 때문의 부활인가, 무엇 때문에 승천인가?

 

이것을 예언자의 말과 자기의 입장과 전 인류의 운명에 서로 관련시켜 보는 때,

그 의미는 모두 명백해져, 하나의 장대광박한 우주철학, 인생철학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그리하여 그들의 심중에 있었던 혼란 착잡이 일조에 통일되어,

그들은 상쾌한 환희 중에 그 몸을 적시었던 것이다.

이는 오순절의 사건의 내적 설명이다.

 

그는 예언자 요엘의 말을 인용하고 또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여기에 새로운 주해(註解)를 주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의미가 예수의 생애의 사건과 관련시켜 비로소 명료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예수가 구약에 있어서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알고,

 

이미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케 하셨도다. 우리는 모두 그 증인이라고 하고

 

그러면 모든 이스라엘의 온 집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으신 이 예수를 세워 하나님이 이를 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되게 하심을 확실히 알라고 맺고 있는 것이다.

 

펜터코스테의 사건의 의미를 알렴에서는, 몸을 베드로 등의 위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구약성서를 읽고 하나님을 배우고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생애를 배우고,

비로소 몸을 베드로의 위치에 둘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허다한 난문제에 접하여 혈루 연이어 흐를 때,

한번 예수의 일 알게 되면 모든 일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복잡으로서 고생하던 우리에게 사상의 통일이 되어져,

환희는 마음에 차고 넘치기에 이르고,

그리고 밖으로의 신장(新裝) 안으로의 단결이라는 이 대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의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먼저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문제를 자기 마음에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문제를 내 마음에 일으키는 데는,

성서 연구라는 유일한 길에 의하는 것 밖에 없다.

즉 구약성서를 알고 또 예수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순서를 거치지 않고서 그저 막연하게 성령의 단비에 젖으려하는 자는,

아무리 애읍하고 열도로서 아버지께 다가선대도 일은 무효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 누가 회의 없으랴!

인생의 모순은 만인의 느끼는 바,

인생 그것이 최대의 문물이다.

 

하지만 한번 하나님께로 부터 힘을 얻을 것인가?

정평 있는 저 대 스핑크스도 흔적 없이 해결되는 것이다.

 

처음 성서를 배우고 그리스도교에 접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생문제가 도리어

복잡해지고 준초해지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성령)이 임하면, 난문(難問) 모두가 풀려버려 다만 감사만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성령의 강림을 기도하여 구할 것이다.

 

하지만 깊고 또 많이 이에 참여하려 하면 당연한 순서를 밟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지식에서 지식으로,

신앙에서 신앙으로 우리가 나아가 마지않는 것으로서 목적을 삼아야 할 것이다.

 

펜테코스테의 사건은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대로 이것을 오늘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가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고

성질을 한가지로 하는 은혜를 입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성서지 연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