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거듭난 삶 2023. 10. 1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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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어떠한 것이었나?

 

 

사도행전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라우셴부슈씨 근저 그리스도교와 사회의 위기를 읽고 느낀 바의 1)

 

 

초대에 교회가 있었던 것은 누구라 해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 같은 것이 아니었음은 오인이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이름은 한 가지로 교회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초대의 교회와 금대의 교회와는,

그 주의, 정신,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지금의 교회라고 하면, 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회당은 이것을 예배당이라 하고, 그 교사는 주로 제사장이다.

기도 있고, 침례식 있고, 성찬식 있고, 이에 따르는데 성서의 송독이 있다.

 

지금의 교회는 신자의 종교심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들은 세상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같이 세상의 사업에 종사하고,

교회에 와서는 세상 사람과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며 이를 섬긴다.

 

그들이 신자 된 증거는 주로 그들이 교회에 속한 데 있다.

교회를 떠나서 그들이 신자임의 징후는 조금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기보다는 주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만든 사회였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바의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하려고 시도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칭하여 성도의 사회라고 했다.

그 안에 예배가 행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예배만이 그 능사는 아니었다.

교회는 신자가 만든 사회였으므로, 그 안에서 신자에게 관계된 모든 일이 행해졌던 것이다.

 

즉 그 몸에 관한 것,

그 지에 관한 것,

의식, 노동, 구제, 교육 등,

신자에 관계된 인사의 만반은 모두 그 안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성서는 자세히 이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으나,

하지만, 그 안에 산재한 일에 관한 기사를 종합하여 볼 때,

이 결론이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신자는 모두 함께 있었다.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그 산업과 소유한 것을 팔아,

필요에 따라 이것을 나누어 주었다’(사도행전 2:44-45)

 

여기서 하나의 공산적 사회가 생겨 났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격려되어 재산 소유의 관념은 없어지고,

환희와 희망을 함께 하는 초대의 신자는

여기서 이 세상의 것까지를 함께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날마다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 있었다. 또 집에 있어서는 빵을 떡을 떼고,

기쁨과 진심으로서 식사를 함께 했다’(사도행전 2:46)

 

재산(재물)을 함께 하고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한다.

친밀(親密)이 이 보다 깊은 데는 없다.

 

빵을 나누고(떡을 떼고),

 

어느 주해자가 말한 대로 성찬식을 행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식사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

 

만찬식은 아니다. 만찬회였다.

 

예수가 항상 그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한 것 같이,

그의 사후,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라 그가 하던 대로,

식사를 함께 하고 마음을 함께 했던 것이다.

 

예수는 일상의 식사를 축사하시고, 이것으로서 참으로 성찬되게 하셨다.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 행하는 성찬식이란,

본래 성도의 거룩한 회식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의식은 애심의 냉각에서 온 것이다.

유쾌한 신자의 회식이 그 애심의 냉각과 동시에,

엄숙 성대한 교회의 성찬식으로 화한 것이다.

 

그러한 공산적 생애에 많은 폐해가 따르지 않는 것 아니다.

 

공산이 신자 위에 강요되기에 이르러,

 

일면으로 아나니아삽비라의 경우 같은 위선을 낳고(사도행전 5),

또 다른 일면으로는 많은 의뢰 신자을 일으켜,

 

일은 도무지 하지 않고, 주로 다른 일만 힘쓰며, 쓸데없는 일을 행하는 자’(데살로니가후서 3:11)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공산적 생애는,

가령 그리스도의 제자라 해도,

이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미결의 문제이다.

 

그리고 초대의 신자가 이것을 행하여,

오래가지 못하고서 실패로 끝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러한 생애가 그들의 이상이었던 것,

그리고 오늘 날이라 해도 역시 인류의 이상임은,

이는 또 의심할 바 없는 일이다.

 

근세에 있어서의 가장 온건한 사회주의가 영국인 로버트(-오웬)로서 시작한 것,

그리고 그의 종생의 이상이 완전한 공산사회를 만드는 것이어서,

그는 몇 번이고 실패했으나 거듭 시도하고,

그리하여 후세에 많은 귀한 교훈을 남겨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실패는 이상을 깨뜨리기에 족하지 못하다.

공산적 사회 같은 고귀한 이상은, 몇 번이고 실패하고서,

그리고서 후에 드디어 광영 있는 성공에 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산적사회란 무신적의 사회를 말함이 아닌 것임을

본인 내촌자는 그리스도와 사회주의에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초대의 그리스도 신자는 대담하게 이 대시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그리스도 신자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여 이상의 실행을

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그리고 이 목적으로서 그들이 만든 것이 즉 초대교회이다.

 

신자위해 생활의 길을 마련하고,

음식물을 함께하여 친밀을 도모하고,

다시 나아가 자제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누가복음을 수취한 데오빌로의 경우 같은 것이 잘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들은 것이 확실한 것임을, 이에 의해 충분히 알아주시기를 바람에서 입니다’(누가복음 1:4)

누가복음이 기록된 목적이었다.

 

기타, 빈자의 구제에 대하여,

과부의 처치에 대하여,

교회는 심려숙고하고,

특히 장로의 직을 마련하여 이 중임(重任)을 감당하게 했다.(사도행전 6)

 

이와 같이 초대의 교회는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그 성질을 달리하고,

성전의 성을 띄지 않고서 사회의 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 때,

신자는 단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도를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서 주인된 사회를 만들고,

이것으로서 세상에 임하여,

세상을 그리스도로 화하게 하려 했다.

 

이는 실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몸인 것으로서,

오늘의 말로서 하면 그리스도적 사교단이었다.

 

그것이, 세상을 화하는데 있어서 비상하게 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신자 모두 함께 있었다.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그 산업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이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 있었다.

또 집에서는 빵을 나누며 떡을 떼고 즐거움과 진심으로서 식사를 함께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모든 백성에게 호감을 샀다. , 구원 받을 자를 날마다 교회에 더하게 하셨다,

 

단지 사도들의 설교에 의해서가 아니다.

신자 전체의 일치 화합의 생애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장 명백하게 세상에 제시되고,

백성은 이것을 기뻐하고, 다투어 자진하여 교회에 가입했던 것이다.

 

보라, 형제 서로 화목하여 함께 있음을,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시편 133:1)

 

너희 서로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 너희가 내 제자된 것을 알 것이다’(요한복음 13:35)

 

세상에 사랑보다 나은 유력한 설교는 없다.

초대의 교회가 하루에 23천의 새로운 신자를 그 중에 더했다고 하는 것은,

그 위에 사랑의 성령이 임하여,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시험하리,

이 시험을,

 

작게나마 천국의 건설을 지상에 시도하여,

가령 그것은 반드시 실패로 끝난대도,

그 전도상의 효과는 천백의 교회를 세우는 것에 승함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내촌(內村)의 글을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