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거듭난 삶 2023. 11. 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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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연설과 순교 2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많은 유대교의 교회가 있었다.

 

리베르티논 교회라 칭하여, 유대인으로서 한 때 이방에 노예 되었던 자가

다시 자유를 얻어 구도에 돌아온 자가 시로 모여 조직한 교회가 있었다.

 

에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생의 유대인으로서 에루살렘 재주자의 조직한 교회가 있었다.

 

기타 모두 이 비슷한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 교의를 싸우고 교세를 다투었지만, 여기서 그들 공통의 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일치단결하여 이에 대했던 것이다.

 

그들이 스데반의 죄상으로서 들어 말한 것은, 주로 다음 2개 조였다.

 

1,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모독

2, 모세와 그의 율법에 대한 모독

 

그들은 이상의 2개조를 내걸어,

모독죄로서 그를 당시의 고등법원인 집의소 산헤드린에 고소했던 것이다.

 

이에 스데반은 홀로 백성 및 제사장, 장로 및 학자들 앞에 섰다.

그는 그의 주 예수가 재판 받듯 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자의 좌상도 한가지이다. 심판인도 한 가지이다.(마태복음 26)

제자는 그 스승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스데반은 예수처럼 재판 받아,

그가 참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실로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대로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빌립보서 3:10) 일로서,

스데반에게 명예 이 이상 없는 일이다.

 

여기서 심판은 열리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다.

그는 물론 그가 방면(放免)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그의 앞에 수적을 대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적인(敵人) 앞에 끌려가,

그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서, 도리어 그들을 사랑했다.

 

사랑은 이때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은근했다. 그의 태도는 평정했다.

이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된 그는 삼가서 광포한 말을 발하지 않았다.

 

형제 및 아버지들이여’(7:1)하고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의 생명을 노리는(빼앗으려는) 적도 그에게 있어서는 적은 아니다.

형제이다. 부모이다.

 

입을 열어 첫마디.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이 일언에 만곡의 정이 없지 않다.

 

연설은 말은 아니다. 진정이다.

친애에 가득한 이 모두(시초)의 일언에 스데반은 이미 청중의 심사를 빼앗은 것이다.

 

적인의 고소에 대하여, 스데반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서,

이에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기태의 변호법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유력한 변호법이었다.

 

그는 성전과 율법을 욕되게 하는 자로서 고소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전과 율법은 이스라엘 역사의 진수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이자가 무엇인지를 말하여,

가장 유효적으로 자기의 입장을 변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변명을 의론에 취하지 않고서 역사에 취한 그의 지혜는,

이는 이때 위에서 그에게 주신 지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참조 : (마가복음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그는 먼저 아브라함의 역사로서 시작했다.

그 배울 바는 무언가?

아브라함은 물론 모세의 율법에 아무 관련은 없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의 죄상에 대하여 자기를 변명하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을 인용함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성전 모독의 무고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의 사적에,

이것을 변명하기에 족한 많은 것이 있었다.

 

성전 당초 무언가?

성전의 존귀는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존재를 예루살렘의 성전에 한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종종 성전 이외에 있어서 사람과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아직 하란에 거주하기 전,

또 아직 이방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때,

하나님은 그것에 나타나,

그의 갈 곳을 넓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고,

또 이 성전이란, 세계의 넓음 같이 넓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고,

또 이에 응답하는 신앙 있을 때,

세계 어느 곳이 성전 아니랴!

 

보라, 하나님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그가 가는 곳마다 그에게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아브라함의 역사는 신인교통(神人交通)을 그 친구라고 부르셨다.

 

(역대 하 20:7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리고 아브라함은 일찍이 일회도 에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한 일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성전과 조금도 관계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손 번영의 약속을 향하심에 있어서

 

(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를 성전으로 부르시지 않고,

그를 들 밖으로 불러내어 하늘의 별을 가리켜 맹서하여 이르셨다.

 

네 자손은 이같이 될 것이다’(창세기15:15)라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의 발자취가 남기는 것이 모두 성전이었다.

 

모래 상수리나무

 

(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박벨라의 굴

 

(23:9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하기를 원하노라),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성소였다.

그러므로 만약 에루살렘 성전 이외 하나님을 구하고 이에 섬기는(예배하는) 것이 모독죄라면,

 

1로 이 죄에 해당되어야 할 분은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 스승 예수 따라, 예루살렘 성전 이외,

세계 이르는 곳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인정하여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시조 아브라함의 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 장로, 학자들은 먼저 아브라함을 죄로 정하고,

그런 후에 스데반을 벌해야 할 것이라고.

 

이는 아브라함의 역사가 스데반의 변호로 된 이유이다.

 

(7:2-8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및 이삭의 아들 야곱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바 없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 요셉의 경력에 대하여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셉의 11형제들(이스라엘의 12지파의 선조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요셉의 11인 형제들은 그에게 대하여 질투로서 불타, 아버지에게 숨기고서 그를 애굽에 팔았다.

 

그런데 그들이 버린 것을 하나님은 주우셨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시어,

모든 환난에서 그를 구출하시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크게 그를 복주시어,

그로 하여금 애굽과 바로의 집을 관리(주관)케 하시고,

또 드디어 그로 하여금 그 아버지 야곱과 그의 전가를 기아에서 구하셨다.

 

요셉의 경우에도 역시 건축가의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옛 속담이

사실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스데반과 그의 주이신 예수를 심판하려하는 제사장, 장로, 학자들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그들도 역시 그들의 선조들을 따라,

여기서 무고를 심판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이 이단시하는 것은 또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 특수한 은혜를 입는 자 아닌가?

그들은 요셉의 경력에 비추어 보고서 크게 삼가야 할 것 아닌가고.

 

스데반은 여기서 그의 국인이 숙지하는 요셉의 사적을 반복하여,

암암리에 자기를 심판하는 자를 심판했던 것이다.

 

(7:9-16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