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거듭난 삶 2023. 11. 1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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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오피아 내시가 침례를 받음

 

성 경: [8:32-40]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8: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 - 53:7의 인용구로 그곳에서 표현은 메시야의 수난과 관련된 예언이다.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메시야의 수난에서 비유적으로 ''을 언급한 것은 메시야가 순종의 제물임과 동시에 희생 제물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8: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자기 백성들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 있으며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재판 과정에서 공의로운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의미할 수 있다.

 

 

 

[8: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 예언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이 누군지를 묻는 내시의 질문에는 매우 진지하고 정중한 문장이 사용되고 있다.

 

'청컨대'는 말을 부탁을 하기 전에 붙이는 '죄송하지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Haenchen).

 

한편 내시는 예언된 고난의 종이 이사야 선지자일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었다는 전설 때문에 그러한 추측이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또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고난의 종으로 상징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대해 내시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에 두 세 가지의 해석들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켜 - 아마도 빌립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 가르쳤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빌립은 사 53:7, 8이 메시야의 고난임을 설명하고 그 메시야가 예수임도 밝혔다.

 

(53:7-8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리고 예수의 가르치심과 수난 및 부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그 내시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많은 학자들은 '물 있는 곳'이라는 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즉 저자는 그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는 장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침례를 베풀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이 두 갈래였으므로 어느 길을 택했느냐에 따라서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빌립이 내시를 어느 지점에서 만났느냐에 따라서도 침례 장소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내시가 '무슨 거리낌이라도 있는가?'라고 반문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침례에 관해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빌립이 예수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침례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마 빌립은 내시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내시는 자신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대신 침례 받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반문 형식의 의문문을 사용했다.

 

 

 

[8: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 이는 두 사람 모두 물에 들어가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浸禮)를 베풀었음을 암시한다.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 빌립을 이끌어 주는 자가 '주의 사자'에 이어(26) '성령'으로 언급된 후(29) 여기서는 또 다른 표현인 '주의 영'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는 서로 같은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한편 '이끌어 간지라'는 재빨리 어떤 것을 채어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빌립을 내시의 눈 앞에서 금방 사라지도록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 기적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빌립의 전도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해 주며 또한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을 부각시켜준다.

 

 

내시는 흔연(欣然)히 길을 가므로 - 혹자는 기쁨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이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이라고 주장한다.(Harmack, Haenchen).

 

그러나 이 기쁨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지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이 아니다.

 

내시에 관한 언급은 여기서 끝나고 있지만 내시가 기뻐하며 걷는 모습은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으리라는 추측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 빌립이 세 번째로 찾아간 선교지 아소도는 가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 지중해 연안 4.8km 대륙 지방으로서,

삼상 6:17에서는 블레셋 성읍인 '아스돗'으로 언급하고 있다.

 

(삼상 6: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이 도시는 처음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암 1:8에 예언된 바대로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거민과 아스글론에서 홀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편 빌립의 선교 활동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두루 포함한다는 본절의 진술은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빌립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를 방문하였을 때

 

(9: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곳에 이미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