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거듭난 삶 2023. 11. 1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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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 도상의 사울 2

 

성 경: [9:4-9]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땅에 엎드러져 - 본 구절은 갑자기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해 나타난 사울의 반사적 행동에 대한 묘사다.

 

여기서 '엎드러져''떨어진다', '넘어진다'의 뜻으로 쓰러지듯 엎드린 사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이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즉각적 반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말을 타고 갔다면 말에서 떨어지다시피 하여 땅 위에 엎드렸을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 혹자는 구약 시대에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격식을 갖추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Longenecker).

 

그러나 사울에게 들려진 예수의 음성은 분명히 애정 어린 음성으로 이해된다.

 

본절 외에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씩 불렀던 경우는

 

아브라함 -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모세 -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무엘 -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시몬 -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을 들 수 있다.

 

이는 부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다.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여 뉘시오니이까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지 못하는 음성에 대하여 사울은 '주여'(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은 자기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했음이 아니다. 이는 사울이 곧이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을 부른 자의 정체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아마도 초자연적 어떤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나온 호칭으로서 짐작된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70인역(LXX)'에고 에이미'의 문장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포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힌 반면 예수는 스스로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본절에서도 역시 예수는 사울에게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선언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동일한 언어습관을 나타내셨다.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자신의 정체를 밝힌 예수께서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께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사울이 예수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활한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사울의 소명 의식이 부활한 예수의 강권적인 능력의 부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가 사울을 아시기 위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본절을 '그는 떨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혀 주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첨가시켰다(KJV).

 

이는 22:10과 조화시키기 위한 첨가로 짐작된다. 아마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는 자들이 섬기던 예수를 만나자 놀라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 사울과 함께 동행 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으나 22:926:14에서는 각각 조금씩 달리 설명했다.

 

22:9에서는 일행이 소리는 못 들었어도 빛은 보았다고 진술하여 본절과 정반대의 상황을 나타내었다.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반면 26:14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 한 점으로 보아 모두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따라서 바울의 세 가지 진술이 모두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소리'는 음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명령한 음성이 예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울의 음성(5)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빛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러한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1) 일행들은 '주여 뉘시오니이까?'라는 사울의 외침만 들었을 것이다(Chrysostom, Bruce).

 

(2) 그들이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Bengel).

 

여기서 강조된 분명한 사실은 사울이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였고 그 사건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사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없는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2:926:14의 기록과 본절의 기록이 지닌 차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사울뿐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말을 못하고 섰더라 - 본 구절은 사울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을 못하고''공포로 인하여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A.C. Hervey).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70인역(LXX)의 사 56:10에서 짖지 못하는 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을 뿐이다.

 

(56:10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그런데 사56:10에서는 이 단어가 공포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56: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아마 누가는, 사울의 일행이 자신들과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 사울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모습은 땅에 엎드러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사울이 보고자 했으나 볼 수 없었던 상태, 즉 빛을 경험한 순간부터 일어서는 시점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사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사울이 경험한 소명 사건은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다기 보다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던 사실은 내면적인 사건으로 돌릴 수 없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음성은 그에게 실제로 들려왔다.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심음을 전폐하니라 - 여기서는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식음(食飮)을 전폐한 사실이다. 즉 사흘 동안에 걸쳐 사울에게 내면적인 어떤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사울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고 자랑스럽게 고수했던 사상체계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의 음성을 연관지어 깊은 고뇌나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사흘'이라는 숫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나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처럼 사건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와 같이 사울의 회심은 자기 자신의 엄청난 내면적 고통을 통한 결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