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거듭난 삶 2023. 11. 1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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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의 안수 2

 

성 경: [9:16-19]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 - 본 구절은 복음전파를 위한 소명과 함께 사울이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서 그 고난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언급된다.

 

이 같은 예고는 13절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말과 상응하는 표현으로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처럼 자신도 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는 고난의 의미로서 보복의 차원이 아니다. 즉 기독교인이 당하게 될 의로운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보이리라''지시하다', '증거하다'의 의미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울에게 보이시겠다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겪어나갈 실제적인 고난을 말한다.

 

즉 사울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를 위해 어떠한 고난을 얼마나 당하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기보다는 실제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형제 사울아 -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방문하여 안수하고는 '형제'라는 호칭으로 사울을 부르고 있다.

 

특히 '형제'(아델포스)라는 칭호가 암시하는바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이미 아나니아는 사울의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인해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따라서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사울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사울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 아나니아의 이 말은 사울의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과 사울에게도 사도적 능력이 부여됨, 그리고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성령이 임하는 방편으로 이해된다.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을 했으나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사울의 눈이 치료되어 침례를 받은 사실과 이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사울이 다시 보게 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제거됨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의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Lumby, Haenchen, Hervey).

 

혹자는 이 기적을 사울이 경험한 주관적 느낌이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Weiss, Barnes).

 

그러나 이 사건은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실적 현상이다(alford, Bengel, Knowling).

왜냐하면 상징적 의미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단순히 '눈을 뜨게 되었다'는 표현만을

사용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울의 눈이 치유된 기적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 그 사건을 사울의 부름 받음에 대한 증거로 기록했던 것이다.

 

 

침례를 받고 - 사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침례를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인생으로 되었다.

 

(3:3-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강건하여지니라 - 사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본문은 9절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사울의 금식이 끝났다는 단순한 의미 외에 사울의 내적 갈등과 고뇌의 종결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본 구절은 사울의 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강건하여지니라'라는 단어는 사울의 변화가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암시한다.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사울이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은 그가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며 또한 그가 다메섹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심과 선교 시작 사이에 나타난 며칠간의 공백 기간에 대한 갈 1:16, 17과의 차이점이다.

 

즉 본 절과 20절에는 사울이 회심한 후 곧바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으며 여러 날 후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묘사된 반면 갈 1:16, 17에서는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한다.

 

(1:16-17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다.

 

혹자는 회심 직후 아라비아를 다녀와서 다메섹에서 머물렀다고 주장한다(Pearson).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23절에 언급된 '여러 날' 이후에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Neander, Meyer).

 

그 외에 올스하우젠(Olshausen) 같은 학자는 25절 사건 이후에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과 바울 자신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 누가는 사울이 회심 후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햇수를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 이후부터 26절 사이에는 3년이란 기간이 걸렸으며 사울은 이 동안에도 복음 전파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