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그때에 빌립이 사마리아 시로 내려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매

거듭난 삶 2023. 11. 1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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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전도

 

사도행전 81-40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옛적의 문명 세계인 로마제국에 전하셨는지, 그것을 전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사람의 계획에 의하지 않고, 그 어떠한 대거전도에도 의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방법과 운동에 의하지 않고서 널리 로마제국을 복음화하신 그 경로를 전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오인은 이 글에 있어서, 사람의 특히 교회의 정략적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전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12사도를 떠나 스데반을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백성의 학자와 장로들(당시의 종교자) 앞에서 예수의 복음을 변론게 하시고, 마침내 순교의 죽음을 취하게 하신 것은, 오인(吾人)이다.

 

스데반으로서, 전도의 중심은, 12사도라 불린 최초의 교역자를 떠나서 평신도에게로 옮겨졌다. 복음은 이제 좁은 유대 국경을 넘어서 넓은 세계로 진출하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집의 잃은 양들 사이에 복음을 전하는 책임이 지워진 12사도들은, 세계 교화(敎化)의 임무에는 오를 수 없었다. 신전도(新傳道)는 신인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이들 새 인물의 선봉이 스데반이었던 것이다.

 

그는 순교의 피로서 신전도의 단서를 연 것이다. 그에 이어서 신인물은 속속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스데반에 이어서 이방 전도의 임무에 나선 자가, 그와 동배의 한 사람인 빌립이었다.

 

이 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해 큰 박해 일어나, 사도들을 제외한 모두가 유다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졌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크게 애곡했다’(8:1-2)

 

여기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그 제1, 신자는 모두 박해를 피하여 지방에 흩어졌는데,

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일이다.

 

그 제2, 신자 아닌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애곡의 소리를 올렸다는 것이다.

 

 

12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것은, 그들이 특히 신앙 두텁고 용기 많았기 때문은 아니다. 신앙과 용기의 점에 있어서는, 스데반과 그의 동배는, 사도들보다 승했으면 승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남은 것은, 박해는 그들의 몸에는 임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열렬한 그리스도 신자였으나, 유대풍의 신자였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 나아가, 성식에 따르고, 굳이 유대국민 감정에 저촉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민은 그들을 허용하고, 그들이 예수를 믿는 까닭에 그들을 군박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12사도들은 예수를 모세의 율법의 완성자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름과 동시에 모세를 떠날 필요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으로서 대표되는 신도의 단체는, 12사도들과 크게 그 신앙의 추이(推移)를 달리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특별한 신성을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또 예수의 복음을

믿음에 의해 모세의 율법을 지킴의 필요 없음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하여 성전과 율법을 초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자를 모독하는 자로서 인정 되었던 것이다.

이것 그들이 국민의 감정을 해친 주요한 이유로서, 그들에 대하여 격렬한 박해가 일어난 원인이었다.

 

스데반과 그의 한 무리들은, 그저 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박해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성전과 율법을 소원히 했기 때문에 박해된 것이다.

 

만약 그들의 신앙이 12사도들의 신앙과 같았더라면, 그들은 박해를 면할 수 있어,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되었을 것이다.

 

이 설명에 의해, 대박해가 예루살렘에 있어서의 신자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성도(聖都)에 남게 된 그 이유가 해득되는 것이다.

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유해를 장사하고, 그를 위해 크게 애곡했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경건한 어떤 사람이란, 신앙 있는 사람 즉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은 아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외국인으로서 유대교에 들어간 사람이다.

 

25절에

 

때에 경건한 어떤 사람들, 천하의 제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머무는 자 있었다고 있음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일본역 성서에는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있는데,

 

원문에는 경건한 사람, 곧 유대인이라고 있다.

 

어떤 성서학자는 유대인이라는 문자는 없이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보존하려고 한다면,

경건한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스데반은 복음위해 생명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의 유해를 장사한 것은 12사도가 아니라, 도리어 교회 이외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즉 스데반에 대한 동정은 사도들의 밑에 속하는 교회에서 가 아니라, 교회 이외,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안다, 사도들과 스데반과의 사이에 신앙상 커다란 차이가 있었음을, 사도들은 스데반의 수난에 처하여 굳이 간섭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데반은 예수의 복음 위해 서서, 박해의 창날을 혼자 그 몸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이 신앙의 사람을 보고만 버려두었던 것이다.

 

스데반은 적에게 미움받고 자기편에서 소원되어 홀로 순교의 죽음에 처했던 것이다.

실로 스데반의 신앙은,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에 있어서는, 헌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였던 것이다. 부대는 찢어져 포도주는 새어나왔던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이제 스데반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좁은 경우를 넘어,

로마제국의 넓은 바다에로 횡일했던 것이다.

 

세상에 교회처럼 보수에 기울어지기 쉬운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한지 얼마 되지 않는 동안에, 사도들의 교회는 이미 보수적 단체로 화하고,

여기서 세계교회의 임()을 타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스데반은 교회를 떠나서 홀로 명예의 죽음을 취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선 것은 그의 동료의 한 사람인 빌립이었다.

 

빌립, 사마리아 시내로 내려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군중, 빌립이 행한 기적을 보고, 또 듣고서, 마음을 같이하여 그가 말하는 바를 들었다. 이로 인하여, 그 시내에 큰 기쁨이 있었다’(8:5, 6, 8)

 

여기 말하는 빌립은, ‘빌립, 바돌로메오’(마태복음10:3)라는 12사도의 한 사람은 아니다.

스데반 및 빌립, 브로고로. . (사도행전 6:5)라고 있는 7집사의 1인이다.

 

후에 전도자 빌립이라 불린 이로서, 가이사라에 살며, 바울의 일행을 그 집으로 영접한 사람이다(사도행전21:8)

 

이 빌립은 7인의 한 사람이라고 있는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데반과 함께, 당시의 예루살렘교회에 있어서 평신도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남의 말씀을 버리고 음식 하는 일에 치중하는 것은 뜻에 합당치 않다’(사도행전 6:2)고 하여, 과부급양의 일을 맡긴 7인의 평신도중 1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시는 바는 사람의 보는 바와는 달라, 음식의 일을 맡긴 이들 7인은(적어도 그 중의 2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는데 가장 힘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12사도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의를 요해한 사람이었다. 과부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정해진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본래 평민의 복음이다. 이것은 평민의 마음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어서는 알지 못하는 가르치심이다. 어부 베드로와 요한에게 해득되는 가르치심이다.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해독되지 못하는 가르치심이다. 어부가 사도로 화한 때, 하나님은 그 손에서 세계교화의 대임을 빼앗아, 이것을 평인인 스데반과 빌립에게 맡기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 유다의 경계를 넘어 세계에 퍼지려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에 접해 사마리아가 있었다. 그리고 유다를 쫓겨나 자유의 복음은 먼저 북경 사마리아의 전수하는 바로 되었다.

 

복음은 지리적 경로 따라 진전했다.

 

신자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 유다 전국, 사마리아 및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으로 될 것이라(사도행전1:8)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 정복의 출발에 나서, 1착의 사마리아 전도는, 12사도의 한 사람이 아니고, 평신도인 빌립에 의해서, 현저한 성공으로서 행해 졌던 것이다.

 

사마리아 전도 성공의 소식에 접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놀랐다. 사도들은 이것을 승인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빌립의 사업을 비준하고, 이로써 교회의 권위를 신전도지 위에 미치게 하려 했다.

 

사업은 이것을 타인에게 하게 하고, 스스로는 교권을 그 위에 펴려 한다. 교회의 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다. 애석하다, 초대의 예루살렘 교회도 수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8:14-2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교회의 세력범위로 돌아갔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빌립은 그 사업을 십이사도들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빌립에게 더 커다란 사업을 주셨다.

 

기꺼이 사마리아를 예루살렘 교회에 물려 준 빌립은 아프리카 대륙이 주어졌던 것이다.

 

스데반으로서 비롯되고, 빌립으로서 처음 이방에 전해지고, 바울로서 전 세계에 심겨진 자유의 복음은, 그 가운데 팽창의 성을 갖춘 것이므로, 이것은 한 지방에 굴복하여 그치는 것은 아니다.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들어가고, 사마리아를 떠나 아프리카로 들어갔다.

 

누구인가, 타인의 영역을 빼앗고, 그것으로서 기쁨으로 삼는 것은, 우리는 주의 복음을 가지고서 땅 끝까지 마치리라.

 

참조 : (로마서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복음은 이제 빌립에 의해 다른 방면으로 향해 발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의 사자는 그에게 임하여 그의 할 일을 지시했다.

 

그는 홀로 일어나, 남방,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도록 명해졌다. 장소는 황야이다.

 

그는 거기서, 에티오피아(구스)사람으로서,

에티오피아 국의 여왕 간다게(8:26)의 대신인 환관으로 여왕의 재보를 관리하는 자,

예배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제 귀국 길에 있는데 만나리라는 것이었다.

 

빌립은 명함 받은 대로 갔다.

가서 그곳에 이르러, 그는 대신이 차중에서 고성으로 이사야서를 읽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성령에 격려되어, 차에 가까이 가서, 대신에게 말을 걸었다.

 

각하는 지금 일고 있는 것을 이해하시는 지요?’라고.

 

이 불의의 질문에 대하여 대신은 겸손히 대답하여 말했다.

 

누가 나를 인도하지 않으면,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고 대신은 빌립을 차내로 청하여, 동좌하여 그의 성서해석을 들었다. 그것은 마침 좋았다.

 

이사야서 537절과 8절이었다.

 

그는 양이 도수장으로 끌려 감 같이 끌려가고또 어린양이,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함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도다. 그는, 굴욕 중에서 의로운 심판을 빼앗겼도다. 누가 능히 그때의 일을 말할 수 있으랴 대저 그의 생명, 땅에서 제거되었도다.'

 

대신은 빌립에게 이 성어의 해석을 구했다. 빌립은 이에 응하여 대답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경우에 있어서 그에게 주신 성어이다. 그는 이 성어에 기초하여 그리스도를 풀이해 말했다.

 

대신은 잘 알았다.

 

때마침 잔잔히 노방에 흐르는 시내가 있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력, 물가로 가서, 에티오피아국의 대신은 무명의 한 신도에게서 회개의 침례를 받았다.

 

두 사람은 감사로서 작별했다.

 

대신은 남으로 빌립은 북으로 그들은 여기서 만났다가 이 세상에 있어서 다시 서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대전도가 행해졌다. 대신은 빌립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 받아, 본국에 돌아가 이것을 그 국인에게 전했다.

 

옛적의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 구석, 나일강 상류 일대의 땅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서, 지금의 뉴비아, 아비시니아에 해당되는 곳이다.

 

전해져 오는 말 있다.

 

지금의 아비시니아왕 메네리크는 대왕 솔로몬의 후윤으로서, 대왕이 예루살렘에서 영화를 극하던 때 멀리서 그를 방문한 시바의 여왕의 태에서 낳은 자의 그 자손의 연면으로서 오늘에 이른 자라고 한다.(열왕기상 10).

 

그리고 아비시니아국이 아프리카 제방 가운데 있어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리스도교국인 것은,

그 최초의 전도를, 여왕 간다게의 대신이 전도자 빌립에게서 복음을 전수한 자에게서 받음에서라고 한다.

 

일은 구비에 속하고, 역사적 사실로서는 생각할 것 아니라하나, 하지만 나일강 상류 제방에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있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대신의 신앙이 그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았음은 살펴 알기에 어렵지 않다.

옛적 전제정치(專制政治)하에, 대신의 감화가 전 국민에게 미친 것은, 다른 데서도 많이 실례 있는 것이다.

 

이같이 하여, 여기서 빌립에 의해 대전도는 행해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전도인 까닭에, 아주 고요히 단독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19:3-4)

 

사람에게 파송되지 않고 하나님께 파송되어, 대를 이루지 않고서 홀로 갔다.

교회의 대거전도는 아니다. 한 신도의 개인전도이다.

 

귀현을 향연에 초청한 것이 아니라,

대신에게 차중에 부른바 되어 그와 상대하여 복음을 말했다.

 

하나님은 성어를 주시고, 천연의 시냇가에 침례의 물을 갖추어 주셨다.

그리하여 빌립 한 사람은 예루살렘의 사도교회가 총동원되어 하고자 하면서

할 수 없었던 대전도를 성취했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인도될 때, 한 사람의 평신도는,

백 교회가 형동하여 천막을 치고 자동차를 몰며 신문에 광고하고 귀현 초대회를 열고서 하려하나 하지 못하는, 커다란, 또는 확실한, 또는 영구적인 전도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요히, 또는 단독으로,

성서에 의해, 성령에 인도되어,

들 길가에서, 시냇가에서 아주 효능 있는 전도는 향해지는 것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빌립이 대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는 예()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이라고 해서 밝히 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꺼이 전도자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어, 허다한 종자(從者)의 목전에서 회개의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 '내시가 기뻐하며 그 길을 갔다'(사도행전 8:30)고 있다.

 

대신이라 해도 사람이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어서 형언하기 어려운 적막을 느끼고,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의 자녀이다. 그라고 해도 참된 복음을 듣고서(들려짐으로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는, 특히 교회 신자는,

대신의 찬성을 구하기를 힘쓰고, 이에 복음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대신을 그리스도 이상의 사람으로 보고, 그에게 복음의 보호를 구하여, 죄의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은 복음을 천시하여 마지않고, 그는 종생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이면서 또 대신에 대한 불실이다. 지금의 종교가는 대신에게 아첨하여, 하나님께 거슬리고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 기쁨의 전도를 끝마친 후에

 

주의 영이 빌립을 데려갔다고 있다.

 

데려 갔다는 것은 움켜 갔다는 뜻이다. 독수리가 그 잡은 것을 움켜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빌립은 아마도 성령에 강요되어서 대신과 떠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른 것이리라.

대신은 아마도 그에게 동반을 청했으리라.

빌립도 그러한 개신자를 얻어, 그와 함께 가서 아프리카 전도를 시도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성령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에 속한 자의 편의를 취하신다

 

대신과 에티오피아국은 하나님의 성수(聖手)안에 있었다.

 

빌립은 그 구원에 대하여 마음 쓸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주의 영, 빌립을 억지로 움켜 간 것이리라.

 

무자비한, 은혜 깊으신 영이여! ‘아소도에서 빌립을 만난 자 있었다.

그는 여러 동네를 지나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라에 이르렀다(8:40)고 있다.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가사의 부근에서 에티오피아국의 대신을 떠난 후에 빌립의 행동에 대하여,

누구도 하는 자 없었다. 다만 북쪽 아소도의 거리에서 그를 만난 자가 있었다.

기쁨에 차서 빌립은 혼자 고요히 이르는 곳마다 그 독특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사도교회의 소재지인 예루살렘에 귀환치 않고서,

장미꽃 피는 샤론의 평야의 북으로 그치는 부근 해변에 세워진 가이사랴 성읍에

그의 거처를 정했다.

 

그는 여기서 고요한 가정을 만들고, 그에게 예언하는 4명의 딸 있어서,

그의 즐거운 전도를 도왔다.

 

(21:8-9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이곳은 후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에 가려고 배를 가이사랴에 댄 때, 수일동안 여로의 피곤을 푼 곳이다.

 

빌립은 스데반처럼 피로서 복음을 증명하지 않았다. 또 바울처럼 널리 세계를 발섭하여, 이르는 곳 마다 깃발을 휘날리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의 사이에 서서, 유대국 이외에 십자가의 복음을 진보(進步)시켰다.

 

실로 이방전도 선등(先登) 제일의 공적은 이것을 전도자 빌립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내촌의 (19155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