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거듭난 삶 2023. 11. 2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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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성 경: [9:26-31]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예루살렘에 가서 - 1:18에 의하면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삼 년만에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15일 동안 체류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게 된 동기는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제자들을 사귀고자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일반 기독교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갈 1:19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외에 다른 한 사도도 만나지 못했음을 진술했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성도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 본문은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으로 교회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고 경계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사울의 제자 됨은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인지 아니면 소문으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는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아마 소문으로도 이미 알려져 있었을 것이고 자신 또한 직접 제자 됨을 언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이 거리상 많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사울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도들은 사울에게서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역시 사울의 회심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을 만큼 예기치 못한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제자 됨'이 사도성(使徒性)을 뜻하는 말인지 단순히 '기독교인이 됨'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사도됨을 진술하려고 의도했다면 누가는 일반 성도의 의미인 '제자'란 용어 대신 '사도'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바나바 -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냉대를 당할 때 사울을 사도들 앞에서 보증해 준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섬 출신으로서 레위인이며 본명은 요셉이었다.

 

그에게 설교하는 능력과 위로하는 능력이 인정되어 바나바라는 이름이 사도들에 의해 주어졌다.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

 

(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울과 동역자가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11:24-30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13:2-4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이러한 그의 경력으로 보아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당시 바나바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 가운데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도 그는 사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전적으로 신뢰하였을 것이다.

 

결국 사울은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을 만나게 되는데 갈 1:19에 따르면 야고보만 만났다고 사울은 말하고 있다.

 

(1: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따라서 누가가 언급한 '사도들에게'란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가운데서 '사도'란 표현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4:4-5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따라서 본 절의 '사도들'은 당시 그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사역을 하던 자들로 짐작된다.

 

 

 

[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라는 뜻이 된다.

 

즉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이며 기독교인들로부터 경계 받거나 배척받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9: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울의 설교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사울이 선교 활동에 어떻게 임했는지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특히 '담대히 말하고''숨김없이 자유롭게 말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사울의 설교 내용보다 사울이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인정되었으며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누가가 바울의 사도성을 나타내기 위한 구체적인 첫 진술로도 이해될 수 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 여기서 언급된 변론자들은 유대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면서 헬라적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받아 논쟁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기독교도였는지 아니면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유대인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모의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에 배타적인 감정을 지닌 유대인들로 짐작된다. 당시 유대 사상가 필로(Philo)가 헬라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 해석할 정도였으므로 유대인들에게 헬라 철학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헬라 철학은 교부들에 의해 신앙을 변증(辨證)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처럼 헬라 사상은 초대 교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울도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다소 출신이므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9: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형제들 - 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도를 좇는 사람들' -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제자' -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성도들' -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형제' -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또는 '형제들' -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 - '다소'가 사울의 고향이었다는 점에서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1: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사울이 다소로 가기 위해 거쳐 갔던 곳이 '가이사랴'이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를 의미한다(Alford, Alexander, Bruce).

 

다메섹에서 당한 살해 위협(23)에 이어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또다시 살해당할 위협을 받고 탈출하게 되는데 이 같은 그의 수난은 선교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16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언처럼 사울이 당해야 하는 고난이며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져야하는 십자가였다.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그리하여 - 이 접속사는 다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사울이 다소로 피신한 것과 본 절이 깊이 연관되었음을 보여준다.

(2) 주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단순히 별 의미 없이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1)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바울이 다소로 피신함으로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찰이 해소되었음을 전해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 이방 지역에도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팔레스틴 지역만을 언급한 것은 이 지역 교회가 이방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가는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틴 지역이 신학적인 문제로 소동이 벌어졌으나 그 문제가 잠잠해졌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지역에서의 교회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교회가 평안하여 - 이 말은 교회에 대한 외부의 박해가 없었다는 의미와 함께 교회가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의 소동 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박해도 잠잠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 : A.D.37-41)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려 하여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41124일에 칼리굴라가 피살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상대적으로 감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든든히 서 가고 - 이 말은 당시 건축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는 교회 성장에 대한 묘사다.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 성도가 연결되어 지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 누가는 초기 교회의 성장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위로''격려', '권면' 등의 뜻으로 여기서는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