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거듭난 삶 2023. 11. 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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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의 안수

 

성 경: [9:10-15]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 때에 - '한편'이란 접속사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 - '제자'로 언급되는 '아나니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3: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이 이름의 히브리적 본래 의미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아나니아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자였다.

 

(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한편 '제자'는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다.

 

참조 : (1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2:12을 볼 때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오랫동안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루살렘 박해 때 피신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오순절 때 기독교인이 되었거나

 

(2:5-11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아니면 그 이전 예수의 활동 당시 예수를 따랐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환상(幻像) 중에 불러 - 본 구절은 아나니아의 구약적인 계시 경험(삼상 3:1-9)에 대한 진술이다.

 

(삼상 3:1-9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이 언급은 사실적 묘사라기 보다 신적 계시에 대한 문학적 묘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서 계시 전달자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다.

 

 

본 절에서 아나니아가 본 환상은

 

(1) 사울을 택하기 위한 주의 치밀한 섭리를 강조하며,

(2) 아직도 의구심에 사로 잡혀 있을 사울에게 증거가 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예수의 부름에 대한 아나니아의 대답은 구약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따라서 본 절에서 사울의 소명 사건을 구약 시대의 소명 사건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 예수가 가라고 지시한 거리 '직가'(直街)는 동서로 곧게 뻗은 거리로서(Vincent)현재는 '다르발 무스타킴'(Darbal Mustaqim)이라고 불리어진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9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금식 행위를 예수는 기도하는 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절박한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조 : (9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와서 안수를 통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환상으로 이미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사울에게 아나니아의 일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사울은 두 번째 환상을 본 셈이 된다. 이같이 치밀한 과정을 통해 사울의 회심시키는 사실을 볼 때 사울에 대한 예수의 깊은 애착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철저한 유대교적 사상과 기독교를 탄압하였던 광신적 열정만큼이나 사울의 회심은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겪고 있는 깊은 고뇌와 예수의 집요한 노력이 사울의 회심을 가능케 하였다.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직접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또한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많은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이미 이전에부터 있어 왔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은 사울의 악명이 이방 지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잔악하고 반() 기독교적인 사울의 행위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예수의 지시는 충격적인 사실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울의 회심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주의 성도 - 이 말은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하나로 '구별된 거룩한 자'를 의미한다. 32절과 41절에서는 단순히 '성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 ''라고 번역된 '당신'()이라는 표현은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는 성도에 대한 박해가 예수에 대한 핍박이며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따라서 사울이 예수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예수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 기독교인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누가는 기독교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의 지루함을 피할 뿐 더러 기독교인에 대한 당시의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도를 의미한다.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 13, 14절에서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사울의 반 기독교적 행위가 언급된 후 예수로부터 사울의 소명(召命)이 극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사울의 선교 대상이 크게 세 가지로 언급되었다.

 

(1) 이방인 - 여기서 예수는 유대 이외의 모든 나라에 대한 선교를 첫 번째 관심사로 언급하고 있다. 사울이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이며 광신적인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소명은 사울의 회심에 걸맞는 매우 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임금 - 이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그립바 왕(26), 가이사(딤후 4:16-17)등 집권자들 앞에서 증언하였던 사울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이 소명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스라엘 자손들 - 사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회심 후에도 그 애정을 잃지 않았다.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사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다만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사울 자신은 이방인을 상대로 그 사역을 감당했다.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택한 나의 그릇 - 선택된 그릇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법으로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22:28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51:34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용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선택된 자임을 의미한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