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거듭난 삶 2023. 11. 23. 00:09
728x90

다시 살게 된 다비다

 

 

성 경: [9:36-43]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9:36] 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 -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현재는 '야파'(Jaffa)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욥바와 애니아를 만났던 '룻다'와의 거리는 약 18km 정도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는 수리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

 

어떤 까닭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여기서 언급된 다비다가 이미 기독교인임을 '제자'라는 말로서 알 수 있다.

 

'제자'의 여성형은 여기서 처음 사용되고 있다(신약성경에서).

'다비다'라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아 그녀는 유대인임에 틀림없으며, 그 이름은 헬라식으로 '도르가'(도르카스)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본 절의 내용으로 보아 다비다는 그 도시에서 잘 알려진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앞장 선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부자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39절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녀가 과부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9: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Bruce). 헬라인들에게도 이러한 절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Knowling).

 

저자의 의도는 장례 절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비다가 완전히 죽어서 이미 장례 절차의 일부를 밟은 후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40절에서 언급되는 다비다의 소생을 자연스럽게 강조하는데 있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한편 시체를 다락에 뉘었다는 사실은 왕상 17:17-24과 왕하 4:32-37의 영향을 받아 다비다를 다시 소생(蘇生)시키고자 하는 기대에서 나온 발상으로 판단할수 있으며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Haenchen).

 

(왕상 17:17-24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왕하 4:32-37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38절에서 언급되듯이 즉시 베드로를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은 그들이 다비다를 다시 살려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다비다가 선행을 많이 하여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주위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살려보려고 애썼을 것이다.

 

 

 

[9: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 '제자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누가의 상투적 용어이며 그들이 보낸 두 사람도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36절의 '여제자'란 말로 볼 때 욥바에 이미 기독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떤 경로로 욥바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8:40에 언급된 빌립의 전도 여행의 영향이거나 2:1-11에서 언급된바 처럼 오순절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다.

 

(2:1-1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 그들의 간청이 다비다를 살아나게 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죽었으니 와서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해달라는 것인지 또 무조건 와 달라고 간청한 것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살려달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이끌어간다는 인상을 준다고 설명한다(Haenchen). 그러나 앞에서 다비다가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누가는 간청의 말에 그 표현을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모든 과부 - 이들은 다비다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베드로 곁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로서 평소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다비다도 과부였다는 가정과 함께 평소에 함께 지냈던 친구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다만 문맥상 구제한 일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36) 그리고 당시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에 속했다는 점에서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에 언급된 과부들은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 이해된다.

 

저회와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 - 렌스키(Lenski)는 다비다가 구제 활동을 위해 봉제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며 프로이쉔(Preuschen)은 다비다의 부유함을 말하기 위해 과부들의 그의 옷을 보여준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는 다비다가 생전에 입던 옷을 보며 그를 추모(追慕)하고 울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과부들이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믿는다면 평소에 다비다가 그 과부들을 위해 만들어 주었던 옷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며 그 은혜를 기억하고 울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적절하다.

 

 

 

[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본 절에서 베드로의 치유 방법은 예수의 행위를 모방했다고 할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 사람을 다 내보내는 행위는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5: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아마도 베드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릴 당시 예수에게서 배운 대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다야 일어나라'라는 말을 아람어로 번역할 경우, 야이로의 딸에게 예수가 했던 말인 '달리다굼'과 거의 일치한다(Haenchen).

 

또한 여기서는 34절에서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칠 때 언급한 '예수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예수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였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한편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사실은 예수의 행위와 닮지 않았고 오히려 왕하 4:33에서 언급된 엘리사의 행위와 비슷하다.

 

따라서 누가의 서술은 예수를 모방하여 행동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엘리사의 사건이(왕하 4) 결부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9: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 베드로가 깨어난 다비다를 일으키는 모습 역시 막 5:41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행위와 흡사하다.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과 권위로 병을 고치면서 자신의 행위 속에서 예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베드로의 행위에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 계실 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그의 산 것을 보이니 - 본 구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행위는 막 5:43에서 묘사된 예수의 행위와 정반대이다.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아마도 42절의 내용으로 보아 전도하기 위한 베드로의 의도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9: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주를 많이 믿더라 - 다비다의 회생(回生)의 결과는 룻다에서 애니아를 치료했던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 치병(治病)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의 확장이 치유 기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선교 때에 의료 선교가 공헌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9: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시몬이라 하는 피장(皮匠)의 집 - 누가는 '시몬'이란 사람의 직업을 명시함으로써 베드로와 구별하고 있다. '피장'이라는 직업은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직업으로서 오늘날의 피혁 제조업자로 이해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피혁 제조업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기피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람과 교제를 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19:5-10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사실은 또한 초기 기독교에서 신분과 직업에 대한 계급적 의식을 무시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천한 신분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음은 다음에 나오는 이방인 고넬료의 개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이 사건은 당시 선민(選民) 의식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을 깨뜨리고 천민과 이방인에게도 평등하게 주의 은총을 선포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