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거듭난 삶 2023. 12. 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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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성 경: [12:6-12]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2: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그 전날 밤에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또다시 이야기의 시점이 언급되고 있다.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기로 작정했던 그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4절에서 유월절 후()라고만 언급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이 끝나는 바로 그 다음 날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유월절이 지난 어느 날을 가리키는지 정확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헤롯이 잡아내려 했다는 말을 볼 때, 특정한 날이 지정되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후라는 말은 유월절이 끝난 니산월 22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유대인의 대명절로서 그 기간 중에는 죄인에게 형을 집행하지 않는 관례(慣例)가 있었기 때문이다.

 

(26:4-5)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따라서 이야기의 시점은 니산월 21일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의 날짜 계산이 저녁 해질 무렵에 하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유월절 기간이 끝나고 22일이 시작된 날 밤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 옥에 갇힌 베드로의 모습에서 두 가지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엄두도 못 낼 만큼 삼엄하고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베드로의 양 옆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병사 두 명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장면 묘사는 도저히 베드로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이 다음에 진술되는 베드로의 구출에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2) 베드로 자신도 탈출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Bauernfeind).

 

이같은 장면에 대해서 베드로가 자신의 처형 날짜가 다가왔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전제하면서 베드로의 침착성과 경건성이 강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는 문맥상 강조점을 베드로가 탈출에 대한 의사도 없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함으로써 베드로를 탈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두고 있다.

 

한편 베드로가 두 군사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진술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베드로가 양옆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고 그 옆에서 두 군사가 지키고 있다.

(2) 베드로를 묶고 있는 두 쇠사슬은 각각 양편의 군사와 함께 묶여 있다.

 

베드로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려 한 헤롯의 의도로 보아 두 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 감방 안에서도 두 사람의 경비병이 있고 문밖에서도 두 사람 이상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역시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임을 강조한다.

 

이로써 누가는 베드로를 구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준다.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주의 사자 -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늘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누가는 `하나님의 사자

 

(10: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또는 단순히 `천사'로도 묘사하고 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주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암시하며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한편으로는 베드로의 구출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을 의미한다.

 

광채가 조요(照耀)하며 - 환한 빛이 감방을 비추었는데 이같은 묘사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그 영광이 임함을 표현하는 전통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 천사는 베드로를 깨우기 위한 수단으로 베드로의 옆구리를 쳤는데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파타쏘'`친다', `때린다' 외에 `때려 눕힌다'(strike down) 또는 `죽인다'(slay) 등으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천사가 베드로에게 세찬 충격을 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주는 듯하다(A.T.Robertson).

 

 

 

[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 이 명령은 계속 강조되고 있는 사실 즉 베드로 자신에게는 탈출하려 하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베드로가 허리띠를 풀고 신까지 벗어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증명된다.

 

당시의 복장은 반드시 허리띠를 띠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산달리아)는 나무나 가죽으로 밑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이용해서 발목에 메는 것이었으므로 벗었다가 신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편안한 상태에서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천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베드로의 구출이 계획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참인줄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환상'은 바로 앞의 `'과 대조되는 단어로서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이 아닌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Haenchen).

 

이같은 묘사 역시 베드로에게는 스스로 탈출하려는 계획이나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구출 사건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12: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 성으로 통하는 쇠문은 `거리로 통하는 철문'을 의미 하는데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도시 또는 시내로 향한 것을 뜻한다.

 

또한 쇠로 된 문이란 매우 육중하고 함부로 열 수 없는 견고한 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절로 열리는지라'는 말과 대조되어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헤롯이 베드로를 성 중에서 가장 견고한 감옥에 구금(拘禁)했음을 의미한다.

 

 

 

[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알겠노라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정신을 차렸다는 말은 곧이어 언급된 알겠노라'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구출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2) 9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이 구출되고 있는 사실을 환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환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의 전체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두 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아해 하면서 천사를 따라 나온 후 천사가 떠나버리자

자기가 감옥 바깥에 확실히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환상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사건의 전모에 대한 의미를 깨닫기 전에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심리 상태를 묘사해 준다. 베드로는 자신이 당한 일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먼저 놀라운 사건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인식해야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가 왜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는지 알게 되는 인식의 과정을 거쳤다. 이는 베드로가 정신이 들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구출되어 처음으로 찾아간 집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마리아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라는 요한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요한의 이름이 당시 독자들에게 지명도(知名度)가 높은 이름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며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이며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이는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이 유대식 이름인 것과 동일하다.

 

그는 바울의 제1차 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과 동행하였는데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2차 여행 때 그의 동행에 관한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기도 한다.

 

(15:37-38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또한 1:13이하에 언급되는 다락방이 본문과 동일한 장소라고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제자들이 수시로 모였던 것 같다.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 5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성도들은 베드로가 체포된 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베드로가 구출되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본절에는 미완료 동사와 분사형이 함께 사용되어 끊임없이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강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