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거듭난 삶 2023. 12. 2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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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지역의 선택에 대해서

 

사도행전 1535-41: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전한 주인공은 바울인데, 그는 전후 4회의 여행으로서 이것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연구의 기사는 그 2회의 전도여행에 관한 기사이다.

 

1회 전도여행은 바울의 예비전도라고도 할 만 하고, 이에 의해 바울은 전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았다.

 

2회 전도여행의 중심은 그리스였다.

처음 바울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뜻했는데, 뜻에 맞지 않아 이것을 버리고, 이웃인 고린도에 전도했다.

 

지망(志望)은 주로 아테네에 있었지만, 사정은 그를 고린도로 가게 했다.

 

3회 전도여행의 중심은 에베소로서, 여기서 그는 그의 3년의 노력을 경주한 중요한 땅이다.

 

4회는 즉 로마전도이다.

 

경솔(졸연)히 사도행전을 읽는 때는, 마치 일기의 초출같이 생각되어, 그것에 아무런 일관된 목적이 없는 것 같아, 이것이 이 이글을 읽는 자에게 흥미를 주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이지만,

 

일찍이 성서학자 바움 가르텐, 독일에 나서, 사도행전의 주의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여겨, 깊은 연구를 거듭하고, 마침내 전술한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

 

이에 의해 이 글 또한 우리에게 친근한 것으로 되었다. 실로 커다란 발견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때까지는 바나바와 바울이 라고 있어서, 바나바는 연령에 있어서도 경력에 있어서도 선배로서, 언제나 그가 주이고 바울은 종이였는데, 여기서 그들 사이에 격론이 생겨 서로 헤어지게 된 후는, 전적으로 바울이 주이다.

 

그리고 그 격론의 원인은, 2회 전도 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의 여부라는, 일견 실로 사사(私事)한 일에 있었던 것이다.

 

바나바는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주의 제자들에게 소개하고, 그리하여 세상에 나서게 한 사람, 기타 곳곳에서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여러 해의 은의를 받은 바울의 선배이다.

 

이제 사사한 일 때문에 이 은인과 다투는 것은 정의를 결여한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의 종은, 다투어야 할 때는, 어떠한 경우라 해도, 어떠한 사람이라 해도 다투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나 온안 평화일 것은 아니다.

 

자신 위해 격론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나,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어떤 때는 격론을 요하는 것으로, 양보하려 해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또 단호히 메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다.

 

특히 세계적 대전도의 길에 오르는 바울의 이 경우 같은 때, 실로 부득한 것이다.

 

일은 단지 마가를 동반하느냐의 여부의 작은 문제가 아니라, 실로 전도 방침의 상위(相違)였던 것이다.

 

바나바를 앞장으로 해서는 도저히 바울의 대() 전도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는 격론이다.

 

다투는 일은 아무리 세차대도, 오래 이것을 마음에 간직해서 둘 것이 아니고, 일이 결정되면 족한 것으로, 곧 잊어버리고 광풍제월, 심중 아무 흔적도 두지 않는다.

 

후에 이르러 다시 마가가 충실하게 바울 위해 일한 것을 보아도, 바울의 격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나바와 바울과 서로 헤어진 후, 바울은 세계적 전도자로 되어 경천동지(驚天動地) 이 활동을 하고, 바나바는 점점 작아져 역사 면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명백하다.

 

바나바는 정에 져서, 자기의 고향인 구브로섬에 가서 고향 위해 노고하고, 바울은 고향에 갔으나, 이것을 통과함에 그치고, 전 세계를 지향하여 발족한 것에 의해 알 수 있다.

 

하나는 뜻, 천하에 있었고, 하나는 구구한 고향의 정실(情實)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오늘이라 해도 이 이 종(二種)의 사람이 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많이 배우는 바 있다.

 

여기서 바울은 노선배와 떠나, 다만 한 사람 실라를 데리고 제2회 전도 여행길에 올랐다.

나이는 40, 혈기 왕성, 희망 만만, 천하 이미 안중에 없는 그의 의기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들의 생애에도 역시 그러한 때가 있다.

곤란은 산처럼 있대도, 이때 전 세계는 내 영분(영역)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시리아(수리아), 길리기아를 거쳐 루스드라에 이르고,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그에게 할례를 하게 했다.

 

일찍이 디도의 경우에 할례를 거부한 바울이, 어찌하여 지금 디모데의 때에는 허락했던가, 의문이 있는 곳이다.

 

설명하는 자는, 디도는 순 이방인이지만 디모데는 반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것을 허락했다고 하는데, 다소의 설명이 안 되는 것 아니다.

 

또 바울은 정치가로서 수희정략을 시도한 일 있으매, 이것도 또한 그의 정략으로 보아 가하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는 깊은 천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12절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리들이란 말이 있는데, 아마도 누가가 일행에 참가하여 3인으로 된 것이리라.

 

환상으로 보았다는 것은,

 

누가 자신이 와서, 마게도니아로 건너가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에게 우리들 도와달라는 청한 것이리라.

이것이 실로 말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는 아름다운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드로아는 유럽에 건너가는 출구로서, 바울은 여기 서서 멀리 유럽의 하늘을 바라 본 것이리라.

 

본래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교통의 편 아직 진보되지 않았던 당시에 있어서는, 역시 오늘날 우리가 태평양 안에 서서 미국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바다를 건너 유럽대륙에 자신이 이 복음을 전하려 함에 있어서, 보통 아닌 바울도 내심 주저하는 바가 있었으리라.

차라리 이것을 보류해 두고 내지에 전도하려 하다가, 하나님께 거부되었으리라.

 

드로아에서 출발하여 사모드라게, 네아볼리 등을 지났지만, 이들을 불구하고, 빌립보에 이르러, 여기서 수일 머물면서 전도했다.

다음에는 또 구구(소소)한 소촌 암비블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우리들이 오늘 아무 뜻 없이 보통 일처럼 독과해 버리지만도, 조금 주의하는 때는 이는 실로 놀라운 바울의 대 영단으로서, 또 그의 지리적 혜안(慧眼)에 경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역시 지리를 아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들도 자칫하면 안의 소양에 주력하면서, 그러한 방면의 일을 경시하는 폐에 빠지기 쉬운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실로 이점에 있어서도 드물게 보는 대 수완과 거안을 가졌던 것으로, 성령의 도우심과 그의 대 영단이 잘 상반하여 세계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바나바에게는 도저히 될 수 없었던 일이고, 또 오늘 우리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바울의 목적은 아테네로서 기타의 장소는 깊이 고려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는 그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로 옮겨 갔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위해 지리를 잘 택하여 그르치지 않고, 정실에 잡히지 않고서 분투했던 것이다.

 

대체로 인간으로서 바울만큼 정에 강한 사람은 없었을 것인데, 그러면서도 조금도 정실에 잡히지 않고, 단호히 지리를 취한 것은 실로 위관이다.

 

동정 또 동정, 갑지(甲地)신자 위해서도 진력하고 싶고 을지(乙地)신자 위해서도 돕고 싶어 각처에 힘을 배분하여, 마침내 크게 하는 일 없이 생애를 마치는 일 같은 것은, 영구히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이다.

 

호한(豪悍) 바나바, 애석하게도 정실에 잡혀, 고향에 가서 천하위해 진력함 없이 생을 마친 것, 길이 후세의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다.

 

물론 고향 위해 진력하는 것도 가하고, 소촌위해 노고하는 것도 가하나, 모름지기 눈을 대국에 경주하여, 복음을 온 천하에 두루 퍼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구주의 들에서 양군(1차 대전) 서로가 사력을 다하여 요지 요지를 점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땅을 두고서 요소 요소에 전도한다는 것은 이는 드디어 방방곡곡 전 세계에 미치지 않는 곳 없이 철저케 하는 일이다.

 

생각건대 바울의 일행 4, 여관에서 저곳 이곳 여러 가지 평의도 있었을 것이나, 바울은 모두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 목적의 아덴(아테네) 및 로마로 지향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내촌감삼의 글을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