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듭난 삶 2024. 1. 3. 00:07
728x90

데살로니가 전도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성 경: [17:1-9]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저희 -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디모데와 누가는 빌립보에 체류중이었다.

 

(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 '암비볼리'(Amphipolis)는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살전 2:14-16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

 

(살전1: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R.N.Longenecker).

 

유대인의 회당 -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로 오기 전 다른 두 도시, 곧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 머물지 않은 부분적인 이유는 그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공동체와 회당이 있었으므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또 곧바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그곳을 선교지로 택했을 것이다.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자기의 규례대로 - '규례''습관', '익숙한 일' 등의 뜻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새로운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 전하는 일을 습관처럼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살라미(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비시디아 안디옥(13: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이고니온(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등에서

 

바울은 이미 그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이 회당을 다른 곳보다 먼저 찾은 이유는 회당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서 거부당한 후에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식의 기계적인 수준을 밟아 증거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항상 우선적(優先的)인 일로 유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2:9-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세 안식일에 - 이 구절만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단지 3주 동안만 머물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3주 이상 그곳에서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을 때는 거리나 그밖의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 (Furneaux).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 것'을 공급받았고

 

(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했다는 점(살전2:9) 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성경을 가지고 - 구약성경을 토대로 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단 한 번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복음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론하며 - '담론하다', '문답하다', '연설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 여기서 바울의 설교 형태가 잘 드러난다.

 

바울 설교의 중심은 대개가 '증거와 선포'의 형태였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 하였다.

 

이러한 증거와 선포는 13:16이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그리고 그가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은 신21:23;2,16,110;53장 등이었을 것이다.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 참고 : (2,16,110; 53)

 

 

 

[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 바울의 설교 끝에는 늘 권고가 뒤따른다. 여기서 바울의 권고로 많은 회심자들이 생긴다.

 

'경건한 헬라인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20:4에 언급된 '아리스다고''세군도'가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라)

 

그리고 '귀부인들'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부인들로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보다도 여성들이 많은 자유를 누렸다.

 

한편 여기서 헨헨(Haenchen)은 사회 지도급 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그들이 바울 일행에 대한 박해를 막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 핍박의 주동 세력은 시 당국자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 (I.H. Marshall).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처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살전 3:3-10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의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니라 갖가지 중상모략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살전 3:3-10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 -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좆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를 와해할 목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시장이나 광장 등의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罵倒)하는 것이었다.

 

야손 - 이는 '여호수아' 또는 '예수'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사람이 유대인(Lenski, Longenecker)이 아니면 이방인 출신(Robertson)이라고 각기 다르게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그의 전도단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처럼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여기서는 '야손'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본 구절의 '야손'이 롬16:21에 언급된 바울 친척인 '야손'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16: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발견치 못하매 - 불량배들의 소동을 접한 집 주인 야손은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야손과 및 형제를 - '형제'(아델포이)란 야손의 형제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여기서는 예수 안에서 함께 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불량배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그들의 눈에 띄는 야손과 다른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끌고가 가당치 않은 누명을 씌워 행정당국에 넘겼다.

 

읍장들 - 이 칭호는 B.C.2세기부터 A.D.3세기에 걸친 시대의 비문에서 발견되었고 마게도냐의 도시들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 칭호는 로마 영토 내의 자치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을 가리킨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 도시로서 인정하여, A.D.1세기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이 도시를 다스리게 했고 그 후 2세기에는 읍장이 6명이 되도록 늘렸다.

 

천하를 어지럽게 - 당시 '천하'라고 하는 말은 곧 로마제국 전체를 가리켰다

 

(2: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따라서 본문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손이나 바울은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셈이다.

 

 

 

[17: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들였도다 - '손님으로 영접하다'는 뜻이다. 이는 야손이 로마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죄를 지었으며, 또 야손의 음모로 그의 집에서 작당(作黨)하여 범죄했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 여기서 가이사의 명은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황제의 법령'을 뜻한다.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반역과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고 제국 내 모든 곳에 적용되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역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 중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모함했을지도 모른다.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그리고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서신들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왕국'이라든가 '임금'이란 말을 가능한 회피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초월하여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은 분명한 사실이다.

 

 

 

[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다른 무리에게 전해지고 읍장들에게 고해지자 이 소란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억울한 누명에 대해서 야손과 그 일행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으며 그들을 위해 증언해 줄 바울과 실라도 그곳에 없어서 읍장들의 처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읍장들은 이러한 고소에 대해 성의 없는 반응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를 받고 놓으니라 - 법정 용어로서 판결이 명한 보석금을 받고 석방했다는 말이다.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의를 제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야손 일행은 이후로 바울의 일행을 도시내에 다시 들이지 않겠으며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지불하는 정도로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어려움이지 야손과 그의 일행의 보석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D.E.Haenchen).

 

한편 살전 2:18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사단이 막음'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며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다.

 

(살전 2: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