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거듭난 삶 2024. 1. 26. 00:04
728x90

바울의 고별 연설

 

사도행전 2017-38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밀레도에서 바울의 에베소의 신자단의 대표자에게 한 고별연설은, 행전 중에서 가장 강하게 사람을 감동케 하는 기사(記事)이다.

 

이것은 아마도 기자인 누가가 그 자리에 있어서 스스로 들은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여기 기록했으리라는 것이다. 성서학 대가 에발트는 말했다.

 

이 연설의 진정을 의심하는 것은 불합리 그것이다라고.

 

바울의 기질, 연설체 등이 아주 선명하게 그 안에 나타나 있다. 그는 강한 감정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정열로 불타고, 몸짓 손짓으로서 강조되었다.

 

내 이 손은, 나와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자의 필요를 위해 수고한 것은 너희가 아는 바라’(사도행전 20:34참조)고 한 대목에서,

 

그가 자기의 손을 청중에 향해 펴서 그와 일행의 자급 독립을 증거한 것을 살펴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알고서 우리들 자신이 필자와 함께 대() 바울의 연설을 듣는 듯이 느낀다.

 

바울의 복음에 비밀은 없었다.

 

그는 유익한 것은 남김없이 이를 전했다’(20-참조)고 말했다. 그리고 그 진수는 간단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신앙’(20-참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총칭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24-참조)이라고 했다.

다시 간략하게 말하면 은혜의 말씀’(32-참조)이라고 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나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사람은 다만 자기를 하나님께 맡기는 길 외에 구원되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신비적인 에베소 사람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간단하기 그지없어 도리어 해득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리고 그들의 장래에 관한 바울의 걱정은 여기에 있었으리라.

 

그는 그들의 장래를 예측하여 말했다.

 

'내가 떠난 후, 이 떼(양떼)를 아끼지 않는 사나운 이리가 너희를 가운데 들어오리라. 또 너희 자신 중에서도, 제자들을 자기에 따르게 하려고, 비뚤어진 것을 말하는 자가 일어나리라‘(30참조).

 

그리고 사실은 그대로였다. 에베소 서간과 디모데전후 양서간은 잘 이것을 보여준다. 에베소 및 아시아 전주(全州)는 바울에게 등졌다.

 

묵시록 같은 것, 일언(一言)도 바울을 언급치 않고 있다.

에베소를 중심하여 일어난 이른바 동방교회는, 오늘이라 해도 번쇄한 신학과 복잡한 의식의 덩어리이다.

 

바울의 단순한 신앙은 오히려 서방교회에 의해 유지되었다.

 

교회에 장로 있고 감독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 이미 장로, 감독의 교회제도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로는 단지 신자내의 연장자로서, 감독은 단지 단체의 주관자(controller)였다.

연장자가 장로역이 되고, 그것이 마침내 화하여 영어의 <프리-스토 priest>로 되어 교직을 의미하기에 이른 것은, 신앙의 교회화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또 감독의 원어는 에피스코포스 episcopos 로서, 단지 감리자 등의 가벼운 의미의 말이다. 그것이 마침내 오늘 같은 근엄(장중)한 직무를 지닌 이에게 적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은, 우리가 그의 서간에 있어서 읽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 근본이었다.

 

주께서 자기 피로서 값 주고 사신 에클레시아(교회)’(28참조)라는 것이었다.

 

산다든가 속량한다든가 라고 하여, 상업상의 거래처럼 들리는데, 상대자에게서 사서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보혈(寶血)의 대가를 지불하여 사람을 신자로 하셨다는 것이다.

 

신자의 귀함은 그것 때문이다. 죄는 무상으로는 없이 되지 않는다. 고통의 대가(代價)는 죽음이요.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그 아들의 죽음으로서 우리들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여 주심으로서, 우리들도 또한 아들이 될 수 있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의 근본 의()였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바울은 그의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 독립을 지켰다.

마게도냐에 있어서 또는 그리스에 있어서 한 것 같이, 그는 아시아에 있어서 했다.

 

내 손 (그는 손을 펴서 말했다) 이 손이, 나와 또는 나와 함께 있는 자의 필요를 채웠다고 그는 말하여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의 금은을 탐한 일이 없다’(33-참조),

 

그는 덧붙여 말했다.

금전상의 문제에 대하여 나는 너희를 괴롭게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의 자만으로서, 바울은 그러한 말을 삼가 했어야 한다고 하는 자도 있으리라.

 

교회는 언제나 대사도의 이 말에 장애되어 성서의 다른 말을 끌어다가, 교사의 유급제도를 변호하고자 한다. , 바울 이외의 사도들은 생활문제는 이것을 집사에게 맡겼다.

행전 62절 이하에 말한 대로이다.

 

두 사도,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음식하는 일에 치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들은 항상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힘쓸 것이라

 

이런 까닭에, 오늘의 교회의 교사도 기도와 전도에 전심 종사하는 외에 음식문제에 관여할 것 아니라고. 실로 괴로운 변호이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독립의 명예만은 종생 이것을 지니려 했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고린도 인에게 써 보내어 말했다.

 

내 자랑하는 바를(독립의 명예를) 사람에게 헛것이 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을 좋게 여긴다(고린도전서 9:15).

 

영국 국교회 교사 래컴은 그 사도행전 주해서에서 바울의 이 태도를 평하여 그의 대담한 자기주의라고 했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들 중에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은 고귀한 자기주의이다.

 

 

 

-복음 전도자의 생활문제-

 

고린도전서914절 이하에서 바울은 복음 전도자가 복음에 의해 생활해야 할 원칙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9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것은 70인 제자를 파견하던 때 예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누가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참조 : The New Bible Commentary: I corin-thians ix. 1-27

 

(내촌의 글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