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거듭난 삶 2024. 1. 3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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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 사역 2

 

성 경: [21:10-16]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 - 바울은 빌립의 집에서 상당 기간을 머물고 있는데 이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결과 심신이 피로했으며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육신의 휴식과 아울러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고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각오를 새로이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지자 아가보는 과거에 몇몇 선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 유대에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였었는데 그 예언이 A.D. 46년 글라우디오 때에 성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1: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이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아가보와 동일 인물이라는 데에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Robertson, Bruce, Lenski).

 

유대로부터 내려와 - 여기서 '유대로부터'라는 표현의 실제 의미는 '예루살렘으로부터'로 보아야 한다.(Haenchen).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 여기서 ''는 폭이 약간 넓고 길이가 길어 허리에 여러 번 둘러감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들고 은실이나 금실로 수놓는 경우도 있었다.

 

(삼상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왕상 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아가보는 이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는 행위로써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 행위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으로,

 

자기의 새 옷을 찢어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예언했던 아히야 -

 

(왕상 11:29-30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벗은 몸과 발로 행하여 애굽인들이 앗수르인들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한 이사야 - 등의 인물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20: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 참조 (13:1-11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 없이 되었더라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 없음 같이 되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27:2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얹고;

 

4:1-3 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아가보의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울의 결박과 투옥을 가리킨다.

 

(30-33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성령이 말씀하시되 - 바울의 고난을 예언하는 아가보의 예언이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말해주는 이 장엄한 표현은,

 

구약성경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표현에 상응한다.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왕하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

 

바울에게 닥칠 고난은 유대인들에 의해 도발(挑發)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

 

두로에서와는 달리 이곳 가이사랴에서는 현지의 성도들 뿐만아니라 바울을 수행했던 누가 일행도 합세하여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었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뜻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뜻이었다.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 또한 예수의 수난에 대해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여준 경우가 있거니와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지금의 경우도 바울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상하게 하느냐 - 이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에 가득찬 눈물의 만류가 마치 바울의 마음을 부수어 버릴 정도로 간곡했음을 나타낸다.

이 표현 속에는 성령의 일을 거역하게 하는 것에 대한 책망보다는 그들의 충정어린 애정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성도들의 애정어린 만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던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고 한다.

 

바울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추측된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Bruce).

 

그는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교회의 단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음에 분명하다.

 

(15:25-32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예루살렘에는 유대계 신자들과 이방 신자들 사이에 소원(疏遠)한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원만한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합의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며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바울은 바로 이 연합을 위해 죽음까지도 무릅쓰려고 한 것이다.

 

 

 

[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 '저가 설득되지 아니하므로

(when he would not be persuaded, KJV)가 된다.

 

아마 그들은 바울의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많다는 식의 그럴듯한 명분(名分)으로 바울을 설득하여 그의 예루살렘 행을 포기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때가 아니라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득을 뿌리칠 수 있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에게 닥쳐올 불행을 넘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본문은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잘못된 충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신앙의 자세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주는데,

 

허비(Hervey) 같은 학자는 이 문구가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응용한 것으로 보며,

 

브루스(Bruce)의 경우는 본문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를 상기시켜 준다고 보기도 한다.

 

 

 

[21: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

 

행장을 준비하여...올라갈새 - 드디어 바울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큐아사메이노'는 신약에서 본절에 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로

'짐을 꾸리다'(Robertson),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성금을 챙기다'(Bengel),

'말의 안장을 꾸리다'(Ramsay) 등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상호 보충적으로 취해질 수 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이고 그 길을 도보로 가기에는 너무 피곤하다는 것, 그렇게 지친 상태로는 예루살렘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물론이고 특히 의사인 누가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교통수단은 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Ramsay).

 

 

 

[21: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 '오랜 제자'라는 표현은 나손이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 즉 오순절의 120명의 제자 가운데(1:15)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Robertson, Haenchen, Bruce).

 

(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이럴 경우 바울은 그와 사전에 친분(親分)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가이사랴의 신도들이 소개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서 '나손을 데리고 가니'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는데 나손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꺼이 영접해 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거처(居處)를 제공해 줄 사람으로 나손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다. (Bru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