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거듭난 삶 2024. 2. 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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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성 경: [21:17-22]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 가이사랴에서 함께 한 성도들을 포함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꺼이 환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형제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형제들'을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시켜서 바울이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견해는(Overbeck)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8, 22절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예루살렘 교회의 비공식적인 접대였다(Lake).

2) 바울의 동료들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사적인 모임을 말하고 있다(Jacquire).

3)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의 성도들이 베푼 환대였다(Beyer).

4) 이들은 헬라적 기독교인들이었다(Knopf).

 

2)3)의 견해가 비교적 무난하다.

 

 

 

[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우리와 함께 - 여기서는 '우리'와 바울이 구분되어 표현된다. 이는 아마 바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인 듯하다.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하고 할 수 있는 야고보를 방문하였다.

 

(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나 요한, 그 밖의 다른 사도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전도나 다른 일을 위해서 출타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Zahn).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장로들 - 이 표현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다.

 

1)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것이라고 본다(Lenski).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단에 대해, 브루스(Bruce)는 야고보가 그의 행정적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단의 동료 장로들과 함께 일했는데, 20절에서 나타나는 바 교인의 수가 수만 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예루살렘에는 야고보를 의장으로 하고 70인의 장로로 구성된 일종의 나사렛 산헤드린(Nazarene Sanhedrin)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2) 야고보는 수석 장로이며 다른 장로들은 바울을 환영하는 자리에 초청된 야고보의 손님들이라고 본다(Robertson).

 

3) 야고보를 제외한 사람들은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다고 본다(Beg, Zahn).

 

자료들이 불충분하여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어려우며 단지 잠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아직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상당히 있었다는 점을(22) 감안할 때 1)의 견해보다는 2)3)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

 

'봉사'(디아코니아)'', '일꾼'을 뜻하는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사명'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또는 '직분'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그의 역할 가운데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 전달도 포함되었을 것인데, 본문에서 그 사항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성금 전달은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언급 할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Bauernfeind). 성금을 전달한 것에 대한 효과가 생각한 것보다 미미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후에 바울을 위하여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당국에 대해 한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오랫동안 투옥되었을 때 그에게 동정을 표시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Furneaux).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한편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일들을 세세히 증언하고 있는데, 그는 그 모든 일들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나타낸다.

 

 

 

[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이 문구는 야고보 및 장로들이 바울의 증언을 매우 호의적으로 들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자기의 봉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주체로 있었다고 증언했으므로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이들이 이야기를 경청한 후 바울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 누가는 야고보의 무리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길들이 많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그런데 '수만 명'이라는 표현은 학자들 간에는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해하기도 하고(Lenski),

불특정한 다수를 과장적으로 서술하는 표현 양식이라고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Haenchen, Robertson).

 

아무튼 야고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이들은 소위 유대적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을 비롯한 각종 규례들을 소중히 여겨 지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울이 깨달은 바,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다음 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다.

 

 

 

[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 바울을 비방(誹謗)하는 소문이 어떻게 떠돌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이러한 소문의 진원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전통에 철저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모세를 배반한다는 것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뜻한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배반했다는 것은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이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바 없으며 오히려 그는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보았고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인정하였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만 바울은 사람들이 율법 자체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들을 배격(排擊)하였던 것이다.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주의 또는 완고한 유대주의에 매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한 바울이 할례를 금하였다는 것도 전혀 터무니 없는 허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할례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으며

 

(고전 7:18-19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도록 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들은 바대로 오해를 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며 이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21: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어찌할꼬 - 야고보 및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신변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실은 이제 곧 다른 교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거센 공격조로 나올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