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거듭난 삶 2024. 2. 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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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대() 예루살렘교회

 

사도행전 2117-2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바울은 형제들의 권고를 물리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일행이 성도(聖都)에 이르자, 형제들은 기꺼이 그를 맞이했다.

 

(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여기 형제들이라고 있음은 바울의 동지를 가리켜 말한다.

 

예루살렘교회는 아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형제를 가졌다.

그와 신앙을 한가지로 하고 목적을 함께하는 자를 가졌다.

두로에, 돌레마이에, 가이사랴에, 그러한 형제들이, 그와 그의 일행을 환영했다.

그리고 또 예루살렘에 있어서도 그러한 동지가 있어서 그들을 환영했다는 것이다.

 

이튿날 바울은 일행과 함께 사도 야고보를 그 집으로 찾았다.

거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도 만나게 되어, 바울은 그들의 안부를 물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써서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일을 하나하나 진술했다.

 

여기서 그는, 그가 일행과 함께 가져온 선물을 장로들에게 인도하여, 이방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과 존경을 표시했으리라.

 

이는 그가 이방전도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전에 약속한 바로서, 여기서 그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한 일은 관대했고, 그리스도적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을 맞이함에 아주 냉담했다.

 

그들은 그의 전도 보고를 듣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1:20)고 한다.

 

하지만 한 마디도 그를 치하하지 않았다.

바울은 물론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전도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쓰인 사람을 위로함은, 보통의 예의(禮儀)이며 또 사랑의 도이다.

 

특히 원로(遠路)에도 가져온 선물에 대하여 깊이 감사를 표시함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보통의 도리이다.

 

그런데 이것을 않고서, 곧 율법 문제를 끄집어내어, 바울로 하여금 율법 준수의 실적을 표시하게 하려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신앙의 형제를 대우함의 도리는 아니다.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모세의 율법을 중시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도를 게을리 했던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달리는 나머지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이미 교회의 사람으로서 신앙개조 엄수 때문에 보통의 예의 또는 인정을 잊어버린 것이다.

 

마땅하다,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바울에 속하고 야고보 및 예루살렘교회에 속하지 않은 것은,

바울은 세계인이었음에 대하여 야고보는 지방인(지방색) 이었다.

 

여기서 사랑의 사도가 제도, 교의, 율법의 사도에 접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바쁘게, 바울이 야고보에게 요구된 것은, 타인의 율법 준수에 관여하여 유대인의 오해를 피하고, 동시에 예루살렘 교회에 파란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실로 괴롭기 그지없는 주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에 따를 것인가?

바울은 하나의 오해를 피하여 다른 오해를 불러옴의 위험이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충량한 유대인으로서 인정될 것이지만도, 예루살렘 교회에는 그의 자유의 복음을 부정케 함의 위험이 있었다.

 

이는 그의 앞에 놓인 함정(계략)으로서. 그는 그 취사에 매우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할 수 있는 한 힘을 다하여 사람들과 화친하라는 것은 그의 평소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있어서 무익한 줄 알면서도 사도 야고보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는 타인의 서원 만료의 의식에 참여하고, 머리를 깎고, 비용을 부담했다.

만약 바울이 이 행위를 변호하려 한다면, 그 자신이 어떤 경우에는 모세율의 실행자였다.

 

그리스의 겐그레아에 있을 때, 서원에 의해 머리를 깎았다’(사도행전 18:18)고 한다.

 

자기가 한 일에 있어서 타인을 도운 것으로, 그중에 조금도 모순이 없다.

바울은 결코 모세율의 파괴자는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율법의 견해를 전연 달리했다.

 

그들은 구원에 율법의 필요를 역설했으나, 바울은 그 불필요를 주장했다.

 

바울은 밝히 말했다.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신앙으로 말미암는다.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않는다’(로마서 3:28).

 

그리고 이는 야고보 및 예루살렘 교회가 수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지금 그러한 사람들 앞에 율법의 일부를 실행하여 보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어떤 사람은, 그가 그의 평소의 창도를 버리고 율법의 구증상 필요를 인정한 것이라고 선전했으리라.

 

마치 오늘의 교회 신자가 교회출석을 촉구하여, 나로 하여금 그 의식에 참여케 하고서,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를 퍼뜨림과 한 가지였다.

 

관대한 바울은 여기서 야고보 및 장로들의 정략에 의해, 커다란 고난을 몸에 초래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의 제의는 그 목적을 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바울은 서원(맹세) 만료의 의식에 참여하여, 유대인의 자기에 대한 시의를 풀도록 하지 못했다.

 

과연 대 반대 운동은 그에 대하여 일어났다.

바울은 폭도의 수중에 빠져 이미 살해되려 했다.

그리고 그의 위험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모두 그를 일의 결과에 맡겼다.

 

바울은 자기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군대의 보호를 얻고,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실로 무익한 양보였다. 그러나 사랑의 양보였다. 그러므로 결국 그의 이익으로 되어 끝났다.

 

(내촌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