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거듭난 삶 2024. 2. 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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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성 경: [22:15-21]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지니는 증거의 포괄성과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enski), 9: 1526:17에 비추어 볼 때 이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바울이 증거해야 했던 내용은 '보고 들은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본 바를 충실히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다.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왜 주저하느뇨 - 이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됨이 더 적절하다.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2:38에서 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침례와 죄 씻음이 연결되어 언급된다.

 

이것은 침례 의식이 죄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침례 그 자체가 죄 씻음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비로소 죄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 이때를 바울이 회심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를 의미한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17-19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정성(眞正性)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22: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9:29에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한 예일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22: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8:3)을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에서 그의 진정한 거듭남을 볼 수 있다.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22: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7:57-60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직접 죽이는 일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再評價)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증인'은 계 2:13;17:6에서 처럼 '순교자'(martyr)의 의미를 갖는다.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한편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어떤 학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그러나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때 감히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19-20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주님은 재차 그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는 본 명령이,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의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