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거듭난 삶 2024. 2. 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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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성 경: [22:6-14]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묘사된다. 9:3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전개되고 있는데,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 때의 시각이 오정쯤 되었다는 것과 홀연히 바울을 둘러 비추인 하늘의 빛이 매우 강렬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나타나는 상세한 묘사이다.

 

이 빛은 정오의 태양 광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지내야 했다.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런데 이 빛은 바울에게만 집중적으로 비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11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땅에 엎드러져 - 본절은 9:4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이것은 바울에게 비추인 하늘의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무력화시켰음을 시사한다.

 

사울아 사울아 -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헬라식 이름이다.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 본문 역시 9:5와 동일한 표현이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첨가되어 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출신의 예수임을 말한다.

 

여기서는 사울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시(同一視)되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일찍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던 바의 성취이다.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 9:17에서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진술 사이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사실 일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의 계시로 보지 못했으며,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직 바울만이 그 순간에 있었던 사건의 경험자이자 완전한 참여자였다.

 

바울은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고 그리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결국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 9:6에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만이 주어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이 질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행한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오순절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마음에 가책을 받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뉘우친 사실과 유사하다(2:37).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데 이는 진정한 회개 또는 회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 이는 바울의 회심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감찰(鑑察)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 결정적인 때가 되자 그를 부르신 것이다. 바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일을 그에게 이를 자도 마련되어 있었다.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쪼인 강렬한 빛은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쬐인 팔레스틴의 강한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한 햇빛을 쳐다보았다 해도 몇 초 또는 몇 분 안에 곧 정상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그마치 사흘 동안이나 장님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아나니아의 안수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환상이나 심리적 착각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실제로 그가 눈이 멀게 된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는 바울의 눈먼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

 

9:10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 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는 것으로 되어있다.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는 것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만큼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변증하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22: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

 

바울이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과정이 9:17, 18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보라'는 명령은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이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同時性)을 강조해 준다.

 

"그를 쳐다보았노라"는 말은 '나는 시력을 회복하여 그를 쳐다보았다'(I received my sight and saw him)는 의미이다.

 

바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 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2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잘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 '택하여'에는 '미리 손으로 잡다'란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세 가지를 행하셨다.

 

첫째는 '당신 뜻'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갖게 될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해야 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다.

 

둘째는 '의인' 즉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하셨다.

'저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 이셨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만든 체험인 동시에 그의 사도직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고전 9:1;15:8)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다.

 

(7-8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