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거듭난 삶 2024. 2. 1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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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바울

 

성 경: [23:1-6]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공회를 주목하여 - 공회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바울에게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인지 아니면 먼저 공의회 회원들로부터 바울에 대한 비난과 고소가 있은 다음 바울에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본 절에서의 바울의 변론 직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과 그것에 대하여 바울이 즉각 강경(强勁)하게 맞서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변론에 앞서 그에 대한 여러 가지 고소가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아마 바울에게로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누가가 유대인들의 고소 장면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Howard Marshall).

 

바울에 대한 고소는 그가 율법과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21: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여하튼 바울은 공의회의 증언대에 섰고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변론에 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주목하여'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노려보며'의 의미를 지니며 담대하게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바울의 이런 담대하고 강한 태도는 3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형제들아 - 22:1'부형들'과는 또 다른 표현인 '형제들'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그런데 이 표현은 공의회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반적인 인사말이었다(Lenski). 공의회에서는 회원들을 존중해 주는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바울이 이런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의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이 모임이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모임이었으리라는 추측이나 설득력이 약하다.

 

둘째는, 이 모임이 공식적인 모임이기는 하였으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양심을 가졌으므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부당하게 굴복할 수 없음을 도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추측이다.

 

그럼으로써 바울이 어설픈 권위나 무력에 의해 굴복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양심''선한 양심'(good conscience)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바울의 이 선언적인 진술은 전날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고발에 대해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무죄함을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적어도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바울 자신은 흠 없음을 의미하고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명한 자의식(自意識)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복음의 빛에서 볼 때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이나 자신의 의가 율법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에서 난 것임을 고백한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섬겼노라''시민으로서 행하다', '어떤 원리나 규책대로 살다'는 의미로서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음과 또 복음의 원리에 따라 생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23: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아나니아 - 이 사람은 네데배우스(Nedebaeus)의 아들 아나니아(Ananiah)48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군림했으며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다.

 

요세푸스(Josephs)에 의하면 그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탐욕적이고 술수에 능한 자였으며 그의 친로마 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66년에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나니아의 집은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아나니아는 헤롯 대왕의 궁전으로 피신하여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 숨어 있다가 그의 형 히스기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Jos. Wars II, 426).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나니아는 바울의 당당한 태도에 즉각적으로 흥분했다.

 

'곁에 섰는 사람들'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산헤드린 의원들이라고 보는 견해와(Lenski) 그곳에 있던 시중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Haenchen),

 

19:24와요 18:22의 예를 볼 때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도 뺨을 맞은 일이 있었지만,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뺨이나 입을 때리는 행위는 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모독하는 표현인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의 한 마디 말에 대해 사리를 따져보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입을 치라 명하는 아나니아의 행위는 그의 폭력적(暴力的) 성격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여실히 드러난다.

 

 

 

[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 바울은 아나니아의 불법적이고도 인격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다.

 

'회칠한 담이여'라는 표현은, 일찍이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회칠한 무덤이여'(23:27)라고

 

맹렬히 질책한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둘은 모두 위선자에 대한 질책의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회칠한 무덤'이 겉은 깨끗한 것 같으나 속은 썩어빠진 상태를 뜻한다면, '회칠한 담'은 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해 흔들거리면서도 겉에 흰 회를 칠해서 튼튼한 것처럼 꾸미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단지 아나니아의 위선을 질책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에게 저주를 선언하기까지에 이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형식이 율법에 기록된 저주 방식이기 때문이다.

 

(28: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혹자는 바울의 이 말을 단순히 관용적인 저주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한다(Jacquier). 아나니아가 66년에 살해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 바울은 아나니아의 위선을 풍자적 대조법을 사용하여 지적하고 있다. 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자가 법을 어기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재판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형벌이 집행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도 정치않는 상태에서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처벌을 명하였으니 그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행위였다.

 

 

 

[23: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 유대 사회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로서 대단한 권위와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대제사장의 권위에 맞설 수 없었다.

 

(17:12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이런 종교적 풍토 속에서 살고 있던 그들로서는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맞서는 것이, 그 내용에 관계없이 제사장을 욕되게 하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일찍이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대답한 것이 불손한 행위로 간주되어 매를 맞으신 사실을 생각한다면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바울의 저주 선언은 매우 불리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23: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알지 못하였노라 본 절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한 자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는가 하는 점이다.

 

혹자는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고 있으면서도 빈정되는 말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자를 대제사장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말했다고 본다(Zahn).

 

그러나 '형제들아'라는 정중한 어투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

 

(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그리고 그의 신앙적 인격으로 보아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참이라고 봄이 무난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눈에는 질환(疾患)이 있었는데

 

(4:13-14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 눈 질환으로 인해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누가 대제사장 직책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본다.(Chrysostom).

 

(2) 바울이 자신의 변증에 너무나 열중했기 때문에 자기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본다.(Bengel).

 

(3) 지금 모인 공의회는 정기적인 산헤드린의 모임이 아니라 로마 관리에 의해 긴급히 소집된 회의이므로 대제사장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옷을 입지 않았고 공식 좌석에도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본다.(Bruce).

 

이 가운데(2), (3)의 견해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무난하다.

 

관원을 비방치 말라 - 이 말은 출 22:28을 인용한 것으로 바울이 저주를 선언한 인물이 대제사장인 것을 정말로 몰랐으며 또한 그가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율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다.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사두개인 - 이들은 당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그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두개인들이 구체적인 집단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 166-63) 부터이다.

 

이들은 순수 유대적 전통만을 고수하고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는데,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 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라 하여 배격하였다.

 

이들은 철저히 현세 지향적이고 친 로마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민중들의 생활과는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바리새인 - 이들 역시 사두개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났는데, 이들은 '하시딤', '하시디안'으로 불리어진 경건 집단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동일하게 권위있는 정경으로 취급하였고,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보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 사과의 뜻이 담겨 있는 바울의 변론(5)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이 연출 되었던 것 같다.

 

(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아무 대책없이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헤드린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던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논쟁(論爭)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바울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넓은 안목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더욱이 지금 일어난 사건이 그의 로마 행의 한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옮길 수 있으며 이는 예수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부활 소망이다.

 

(고전 15:16-58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부활을 믿는 것이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와 관계없이 전승 되어온 신앙에 근거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