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거듭난 삶 2024. 2. 1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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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성 경: [25:1-12]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 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25:1]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도임한 지 삼일 후에 - '도임한 지'는 직역하면 '(province)에 발을 올려놓은 지'가 된다. 결국 통치할 땅에 발을 올려 놓는 것으로 취임을 표현한 것이다.

 

베스도는 58-60년경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62년경 사망하기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삼일 후에'라는 표현은 제3일째를 가리키는 유대적 어법이다. 그러니까 베스도 신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를 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새로운 곳에 처음 부임한 베스도로서는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하루라도 빨리 파악하는 것과 지역의 유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여는 것이 급선무였고 예루살렘이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으므로 그곳부터 방문한 것이다.

 

 

 

[25: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대제사장은 파비(Phabi)의 아들 이스마엘이었다.

 

헤롯 아그립바 2(Herod Agrippa II)가 벨릭스 통치 말기에 이스마엘로 하여금 아나니아의 대 제사장직을 계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Jos, Angiq., XX, 179<iii, 8>,194<viii, 11>, 196<viii, 11>).

 

그의 임기에 대해서는 탈무드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이 각각 다른데 전자에 의하면 10년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 의하면 베스도 통치 기간에 아그립바 2세가 대제사장직을 다시 이스마엘에서 요셉으로 교체시켰다 한다.

요세푸스에 따른다면 이스마엘의 재임 기간은 2년이 채 못 되는 셈이다.

 

한편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형은 전임자(前任者)들까지도 포함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이고 종신제이며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는 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전직 대제사장들도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었고 그 위치가 존중되었으므로 통상 이들을 같이 부를 때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바에 대해서는 산헤드린의 영향력있는 회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15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한편 신임 총독이 관할 지방의 유력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하여 다시금 바울을 공격하고 나섰다.

 

산헤드린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는 의지가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는, 그들이 무려 2년이 지나도록 바울을 죽이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25: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 대제사장들 이하 산헤드린은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바울을 죽일 수 없음을 확인한 바 있으므로 불법적으로 살해하려 한다.

 

그들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악용하여 다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되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경우 자객을 매복(埋伏)시켰다가 중간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25: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 베스도는 결코 호락호락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의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

어쩌면 전임자인 벨릭스가 베스도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개요를 일러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첫째,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만큼 그가 도주할 염려는 없다.

둘째, 베스도 자신이 '미구(未久)'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이므로 굳이 바울을 불러올릴 필요가 없다.

 

여기서 '미구'는 일정한 방향을 향해 빨리 나아감을 뜻한다.

 

 

 

[25:5]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유력한 자들은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

'유력한 자들'15절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보며(Overbeck), 그 의미는 '책임 있는 대표자' 정도로 이해된다.

 

베스도는 그들의 재판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면 그들 중 책임 있는 대표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소송을 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바울을 호송해오자면 여러 면에서 번잡스러우며 또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법정에 구류되어있는 자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 데려와 재판한다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국 베스도의 신중한 판단으로 바울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게 된 셈이다.

 

 

 

[25: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머무른 기간에 대해 헬라어 성경(사본)들 가운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는 한글개역성경 본문처럼 '8일 혹은 10'을 지지한다.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 베스도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공식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 받는 셈이 되었고

 

(22: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 참조 : (24:1-22)

 

또한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에 대해 자신의 무죄함을 또다시 증명해 보여야 했다.

 

 

 

[25: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 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며 그러한 분위기로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고소 내용은 더둘로의 것에 비해(24:5, 6) 더 새로운 것이 없었던 듯하며 여러 가지 중한 죄목으로 송사(訟事)하였으나 단 한 가지도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이 소송사건이 무려 2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설사 기소된 내용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증인을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전혀 터무니없는 사실로써 모함하려 하니 증인이 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5: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제기된 모든 고발을 집약적으로 종합하여 반박하고 있다.

 

율법이나,

 

(21: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성전은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유대인들과 관계된 것이고,

 

'가이사에게'라 함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반란자, 또는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고 말한 것(24:5)에 대한 요약적 변론이라고 할 수 있다.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는 단언은 유대인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바울의 변론을 반박하지 못하였다.

 

한편 '가이사'는 원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2-44)의 속명(俗名)이었으나, 그의 양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B.C. 27년에 로마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가이사는 황제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참조로 역대 가이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2) 디베료(14-37)

(3) 칼리굴라(37-41),

(4) 글라우디오 (41-54)

(5) 네로(54-68)

(6) 갈바(68-69)

(7) 오토(69)

(8) 비텔리우스(69)

(9) 베시파시아누스(69-79)

(10) 티투스(79-81)

(11) 도미티아누스(81-96)

(12) 네르바(96-98)

(13)트라야누스(98-117)

(14) 하드리아누스(117-138).

 

 

 

[25: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 원고측과 피고의 진술을 다 들은 베스도는 즉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고

 

(7-8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 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따라서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는다.

 

베스도가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은, 만약 그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임(赴任) 초 부터 유대의 지도자들과 부딪쳐 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의 통치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총독 관할지역의 주민들이 총독에 대한 불평을 황제에게 고할 수 있었고, 그럴경우 고발을 당한 총독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스도는 이런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5:10]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가 로마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재판대 앞에선 이상 끝까지 가이사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로마 시민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유대의 산헤드린에 서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를 거절하는 의미에서 이 사실을 확인시킨 뒤 자신의 무고함을 다시 한번 주장하고 있다.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 이는 바울이 지금 목숨에 연연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를 문제삼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요세푸스가 피고의 입장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려 하는 의도를 보이자 즉시 가이사에게 항소(抗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루살렘에는 심각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23:14-16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로마 시민은 지방 행정장관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 받았다. 특히 지방 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대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지방 관청은 그 호소자를 로마에까지 호송하여 황제의 재판을 직접 받도록 해야 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그는 54-68년에 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Afranius Burus)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한 때는 네로가 선정(善政)을 베풀던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그는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가고자 했언 자신의 희망과,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할 소명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Robertson).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25: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 '배석자'란 배심원 회의의 위원들을 가리키며 의회의 판사들, 법 전문가들, 그리고 총독의 고문들로 이루어졌다.(Haenchen).

 

최종적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석자(陪席者)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었다.

 

지금 이들이 상의한 것은 바울의 항소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과연 바울에 대한 고소가 중대한 것인가의 여부가 논의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대한 소송건 일 경우에 그 항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란죄로 고소하였고,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반란죄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제목이었으므로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한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바울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문제가 그에게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이 불편한 재판에 대한 판결을 황제에게 넘김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