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거듭난 삶 2024. 3. 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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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뱃사람들에게 위로

[로마로 향하는 바울]

 

 

성 경: [27:21-28]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배에 탄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파도와 바람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배 속에서 지독한 멀미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음식을 먹지 못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가운데 서서 - 절망과 허기 속에 있던 무리들 가운데 바울은 지난날 자기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나서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한 구원의 길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바울이 절망과 낙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내는 까닭은 결코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바울 자신의 옳은 판단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기 위함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부터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판단하고 지시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 드디어 바울은 희망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풍랑이나 허기짐보다 오히려 삶의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먼저 그들의 불안을 제거시키기 위해 배는 잃게 되더라도 생명은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계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23-24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들은 그 즉시는 안심하지 못했고 구체적인 징후들이 보인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27-36).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하나님의 사자 - 바울은 자기의 이야기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가 계시해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배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교도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천사'의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바울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해주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8:9-10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22:17-21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난 천사가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동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은연중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고 있다.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 본래부터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본절은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관철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에게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하지 않고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삶이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즉 바울의 삶은 오직 복음 선포로 인하여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 이는 바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와 함께 한 275명의 생명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주셨다'는 바울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을 바울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 된다. 아마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의거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바울의 말을 믿고 안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바울의 믿음은 매우 확고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바울의 이런 확실한 신앙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절망적인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 신앙의 독특함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는 죄인 이상의 어떤 고상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을 것이다.

 

 

 

[27: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한 섬에 걸리리라 -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장래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

 

'배가 어느 한 섬에 걸릴 것이고 그러면 배는 잃게 될 것이나 사람들의 생명은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22).

 

앞으로 일어날 결과는 바울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성을 사실로 드러낼 것이다.

 

 

 

[27:27]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열 나흘째 되는 날 -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미항에서 멜리데 섬까지 약 800Km 이르는 거리를 14일간 유라굴로라는 태풍에 떠밀려 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수일간 계속되는 태풍 때문에 11-3월 사이에는 항해가 중단된다.

 

아드리아 바다 - 오늘날에는 이탈리아와 유고 슬라비아 사이의 바다를 이렇게 부르는데 당시에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레비 섬, 헬라사이의 바다를 가리켰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이 탄 배가 팔레스틴에서 로마로 항해하다가 아드리아해 한 가운데서 난파당했던 일을 기록에 남겨놓았다(Jos., Vita 15).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 배가 육지에 가까와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배 밑에 있는 방류묘가 밑바닥에 부딪히는 것으로 알았다.(Breusing).

(2) 배가 동쪽에서 성() 바울(St. Paul)만으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쿠라곶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날 때 쿠라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고 알았을 것이다.(Smith, Beg, Lenski).

 

두 견해가 다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전자의 견해는 방류묘의 길이가 36m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므로(28절 참조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Haenchen),

 

후자의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만약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배에 탄 사람들이 들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삶에의 희망을 보여주는 기쁨의 소리로 들었을 것이고 그를 통해 바울의 예언이 사실로 다가옴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2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27: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 - 여기서의 ''은 양 팔을 벌려서 쭉 폈을 때 한 손의 중지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나타낸다. 이 길이는 대략 1.8m로 본다.

 

그러니까 본문의 '이십 길'은 수심이 36m였다는 뜻이고 다음에 잰 '열다섯 길'은 수심이 27m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수심이 빠른 속도로 얕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암초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짐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