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거듭난 삶 2024. 3. 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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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 섬에 도착

 

성 경: [28:1-10]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28: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육지에 상륙하고 난 후에야 그곳이 멜리데라는 섬인 것을 알았다.

 

멜리데는 오늘날의 말타(Malta)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섬은 시실리 남쪽 약 98Km, 아프리카 북동쪽 약32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전체 길이가 약 29Km 되고 너비가 15Km 정도 되는 작은 섬이다.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은 이 섬에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B.C. 218년 로마가 제 2차 카르타고 전쟁 초기에 이곳을 점령하여 다스려 왔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섬을 관할(管轄)하는 행정관을 세웠는데, 그 명칭은 '멜리데의 자치에 있어서 모든 일을 관할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멜리테시움 프리무스 옴니움' (Melitesium Primus Omnium)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섬에 많은 수의 퇴역 군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 섬은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바울의 예언은 성취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7: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8: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

 

'토인들' - 본문에서는 그 용법상 야만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헬라인들이 그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는 헬라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을 가리킨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다행스럽게도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배에서 내린 바울 일행에게 적대 행위를 하지 않고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준 뒤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도록 배려(配慮)해 주었다. 더구나 그들이 베풀어준 친절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친절이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27:24-25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기서 '우리'가 뜻하는 것이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

 

(27: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아니면 바울과 함께한 기독교인의 소그룹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276명 전체가 하나의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Haenchen).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에게 모아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적당한 규모로 무리를 지어 불을 지폈을 것이다.

 

 

 

[28:3]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 계속해서 불을 피우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으므로 사람들은 불을 쬐는 틈틈이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야 했을 것이다. 바울은 죄수 신분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 때문에도 열심히 마른 나무들을 주어다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주어다 불에 넣고 옆에 앉아 불을 쬐려니까 그 나무속에 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바울의 손가락을 무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독사'는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한 단어이며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7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예수께서도 사용한 바 있는 말이다.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런데 혹자는 오늘날 멜리데 섬에 독사가 없다는 조사 결과와(Preuschen), 바울이 물렸으나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5-6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바울의 손에 달린 뱀이 독이 없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Loisy). 그러나 원주민들이 독사와 독이 없는 뱀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 없고 의사인 누가가 그런 정도의 구별을 못했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섬에 독사가 없다고 해서 오랜 과거에도 없었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독사가 아닐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태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거나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고 보면, 이곳 멜리테 섬의 독사도 이렇게 도태되어 없어진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amsay).

 

 

 

[28: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

 

원주민들은 틀림없이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그가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으나 끝내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는 것은 필경 그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의'가 끝까지 응보한 것이라고 여겼다.

 

 

 

[28: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

 

바울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손을 흔들어 뱀을 불 속에 떨어버렸다.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고,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바울에게는 이상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막 16:18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본절에서 '짐승'으로 표현된 '데리온'은 위험한 짐승 특히 뱀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로 입증되었다. (Bauer,Worterb).

 

 

 

[28: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

 

바울이 뱀에 물렸으므로 당연히 그의 손이 부어오르고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그 원주민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원주민들은 달리 해명할 길이 없게 되자 바울더러 신()이라고 칭하였다.

 

신의 심판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던 그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멜리데섬의 원주민들은 루스드라에서(14:11-18)와는 달리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려 하거나 당연히 신에게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14:11-18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아마 그들의 말은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뱀에 물렸으나 기적적으로 생명을 잃지 않은 클레오메네스(Cleomenes)에 대해 '신이 사랑하는 자'(데오필레스) 라고 묘사한 풀루타크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고 그분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원주민들로서는 그 이상 달리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Haenchen).

 

 

 

[28: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 - '제일 높은 사람' 이 이 섬의 토착민 추장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이 섬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수(領首)'를 뜻하는 '프로토스'가 로마에서 파견한 최고 행정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가 있음을 감안할 때(Corpus Inscripionum Latinarum10.7465),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름 '보블리오'는 라틴계 이름으로 보이며 '푸블리우스'(Publius)'포필리우스'(Popilius)를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Ramsay, Haenchen, Bruce).

 

혹자는 누가가 이 사람의 이름만을 기술한 것에서, 석 달 동안 바울 일행이 그곳에 머물면서 바울, 누가 그리고 보블리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추측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람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여 사흘간 친절한 대답을 하였다. 아마 이 사람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소작인들을 거느릴 만큼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열병과 이질 - 여기서 열병은 멜리데와 지브랄타의 지중해 해역에 오랫동안 널리 퍼져있던 말라리아와 같은 것이다.

 

이 열병에 걸리면 그 고통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보통 4개월 이상 고통을 당하였고 긴 경우에는 2-4년간 지속되기도 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 병이 멜리데의 염소 젖을 먹고 발병한다는 것과 그 병원체가 미생물 '마이크로코쿠스 멜리텐시스' (Micrococcus melitensis)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887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뒤센테리오'로 표현된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또 다른 질병 '이질'은 곱똥이 나오고 뒤가 잦은 질병을 가리킨다.

 

의사인 누가는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나 병을 고치는 것은 오직 바울의 기도와 안수의 결과였다.

 

바울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를 알리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침으로써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과 하나님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28: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친 소문은 멜리데 섬 전체에 금방 퍼져 나갔고 그리하여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들어 병 고침 받기를 원했다.

 

본문의 '고침을 받고'의 헬라어 표현 '데라퓨오'는 의학적 술어이다.

이에 대해서 람세이(Ramsay)는 누가가 의사로서 치료를 했을 경우 '데라퓨오'가 사용되고 바울이 안수하여 치유한 경우에는 '이아오마이'가 사용된다고 구분하며 더 나아가 하르낙(Harnack)은 본문의 병자들이 누가의 치료를 받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의학적인 치료와 기적적인 치유가 단어의 사용에 의해 드러난다고 하는 람세이(Ramsay)의 분석은 일리는 있지만 보편성을 갖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치유 행위에 대해서는 위의 두 가지 동사가 모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참조 :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물론 본문에 나오는 치유에 대해서 의사인 누가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구태여 바울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누가가 가볍게 치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치유의 주체가 바울이라는 것이며

 

'치유를 받았다'는 의학적 표현은 바울의 이적적인 치유가 의학적으로 완치(完治) 판정을 받은 것임을 밝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 바울 일행과 섬사람들 사이에 매우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의 '후한 예'에는 의사의 치료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서 사례금을 지급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고마운 행동에 대한 '존경''감사'의 표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섬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머물 때 뿐만 아니라 떠날 때에도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마 식량과 의복 같은 필수품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한 사람에 의해 그와 함께 있던 275명의 사람들도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