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거듭난 삶 2024. 3. 1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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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요한

 

마가복음 12-8: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리라.

 

*참조 ; 누가복음 31-18, 요한복음 119-37.

 

침례 요한, 그는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예수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이때까지 침례 요한보다 큰 사람(인물)은 일어난 일이 없다’(마태복음 11:11).

즉 그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인물이었다고. 과연 그러한가.

요한은 제일로, 예수의 소개자였다.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하여,

예수를 세상에 소개한 사람은 그 였다.

소개의 책임이란, 가장 중한 것이다.

 

먼저 첫째로, 소개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둘째로, 자기가 전 책임을 지고서 소개의 임무에 임해야 한다.

셋째로 그와 나와 책임을 나누어 사업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개는 쉽게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한 이상은, 그 책임을 피해서는 안 된다.

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그의 불신(不信)의 국인(國人)에게 소개했다.

그 행위의 대담함이란, 후에 이르러 제자들이 그를 그리스도라 하여 세상에 창도한 것보다 훨씬 승한 것이다.

당시, 천하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다만 요한 한 사람이었다.

 

위인만이, 위인을 안다.

목수의 아들 예수를 붙잡고서,

 

나는 굽혀 그 신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족하지 못하다’ (3:11 참조)고 한 그는,

잘 예수를 안 사람이었다.

 

예수는 한 사람의 지기(知己)에 의해 세상에 나오셨다.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마음 든든했으랴!

혼자 고단에서는 일마저 어려운 것이다.

가령 예수라 해도, 세상에 나타나심에 있어서 소개자를 요했던 것이다.

그 소개의 임무를 담당한 사람이 침례 요한이었다.

그는 실로 여인이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다.

 

요한은 제2, 예수의 선구자였다.

 

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 이르기를,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다니실 길을 곧게 하라고 한 예언자의 말에 합한 사람이었다.

 

이것 또한 대역(important task)이다.

전쟁에서 말하면 선진이다.

문화사업에서 말하면 개척자(pioneer)이다.

암흑대륙 발견의 길에 오른 콜룸버스(8316역주)이다.

용맹스럽기도 하려니와 또 곤란하기도 하다.

 

그런데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선구자(앞장)였던 것이다.

단독으로, 용감하게, 세상에 한 사람의 동정자 없고,

혼자 보고 혼자 바라며, 혼자 탄식하고 혼자 울었다.

 

요한이, 들에 있으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당시의 사회와 교회는 그에 대해 말했으리라.

 

그는 불평가이다. 은둔자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물리치고 무익하게 난업고행하는 자이라고.

그들은 그의 불평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다고 탄식하지 않았다.

왕공 귀족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분내지 않았다.

그에게 불평이 있었으나, 그것은 거룩하고 귀한 불평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 받았다. 그 실현을 바랐다.

그리하여 대() 이상, () 희망에 압도되어 평온할 수 없었다.

사람은 그가 가지는 이상이 높은 만큼, 그 만큼 고독하다.

() 시인, 종교가, 정치가는 모두 고독했다.

그들은 이른바 우주적 비탄 (cosmic sorrow)에 잡힌 사람이다.

 

오늘 사교적인 것으로서 문화생활의 제1요소로 여기지만도,

모든 대() 진보, 또는 향상, 또는 발견은 고독한 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침례 요한의 진가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 인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요한은 어떻게 하여 예수 위해 길을 예비하고, 그 다니실 길을 곧게 했던가?

 

엄격한 정의를 주창하고, 이것을 행하는 일로서이다.

 

아아,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임하려는 진노를 피할 것을 일러주었는가? 그렇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누가복음 3:7-9)라고.

 

이것은 심판이지 은혜는 아니다.

엄격한 정의의 창도이지. 죄 사함의 복음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의없는 곳에 복음은 있을 수 없다.

심판이 없는 곳에 죄의 사함을 말할 수 가 없다.

 

그래 요한 있고서의 예수이시다.

예언자 없이 그리스도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예수와 요한을 비교하여 이자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나님은 먼저 요한으로 하여금 엄격한 정의를 말하게 하시고,

그런 후에 예수로써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먼저 아름다운(좋은) 토양을 만들게 하시고, 그런 후에 좋은 종자를 뿌리게 되셨다.

그러므로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엄격한 정의의 준비 없는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번영한 예는 없다.

그 의미에 있어서 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예언자는 예수의 선구자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서,

준엄한 도덕이 행해지지 않는 곳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침례 요한은,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위해 필요했다.

 

구약을 배척하고 신약을 받지 못한다.

시내산의 불꽃으로서 불태우는 일 없이, 갈릴리 호수의 은혜를 입을 수는 없다.

퓨리탄(234역주) 도덕이 있어서, 건전한 영미의 그리스도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것 없기에 이르러 참된 복음은 땅에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일본에 있어서도 가장 선한 크리스천은 엄격한 무사의 집에 일어났다.

상제의 자애있음만 알고, 도덕의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을 모르는 이른바 장돌뱅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한대도 다만 사랑의 감미를 기뻐하는데 그치고,

의의 맺고 귀함에 견디지 못한다.

 

그 의미에 있어서 순결한 유고와 공정한 신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좋은 준비였다.

이또우진사이(1627-1705), 나까에도우쥬(8152역주), 모도오리노리나가(1730-1801),

히라다아쯔다네( 1776-1843)등은,

일본에 있어서 얼마나마 침례 요한의 일을 한 사람들이다.

 

이와 비교하여 불교 특히 정토문의 불교는, 아미타의 자비를 부르는 것(나무아미타불), 너무 간절하여,

도리어 하나님의 의에 기초하는 그리스도 복음을 정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방해를 했다.

 

채찍과 훈계는 지혜를 준다. 마음대로 하게 버려둔 자식은 그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잠언 29:15)고 있다.

 

엄격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진 자식은 복되다.

자유해방이라고 하여, ‘채찍과 훈계는 이를 그 모든 형태에 있어서 배척하는 자는

진리의 향연에 참여할 수는 없다.

 

근대인은 침례 요한을 배척하고,

그를 피하여 그에 의하지 않고서 곧 예수에게로 이르고자하여,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한다.

 

먼저 정의의 소학에서 배우지 않고서, 복음의 대학에 들어갈 수는 없다.

 

안드레처럼, 먼저 요한의 선한 제자였던 자가,

예수의 가장 선한(좋은) 제자로 된 것이다.

(1:35 이하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예수의 지상의 생애가 복음의 시작이었음 같이,

그 복음은 또 요한의 준엄하여 범할 수 없는 생애로써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