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거듭난 삶 2024. 3. 1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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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침례

 

마가복음 19-11: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참조 : (마태복음 313-17, 누가복음 21-22, 요한복음 132-34)

 

침례(Baptisma), 요한 또는 그리스도로써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대 민족 간에 널리 행해진 의식이었다.

그리고 유대인간에 있어서도 또 입회 또는 입문의 식으로서 일반에 행해졌다.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가는 때에 이 식이 행해졌다.

또 유대인으로서 범속 이상의 신생애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이 식을 받았다.

그러므로 요한은 침례를 베풀어 그 당시 일반에게 행해진

입문습을 채용한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특징은 침례의식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의 목적에 있었던 것이다.

장차 나타나려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죄의 회개를 표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죄의 회개를 표시하기 위한 침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컬어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회개의 침례라고 했다.

또는 단지 요한의 침례라고 했다.

 

(사도행전 18: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그리고 예수는 여기서 이 요한의 침례를 받고자 하여,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요단(요르단)으로 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는 어찌하여 요한의 침례를 받으셨던가고 하는데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에게 회개할 죄는 없었다.

마태복음은 이 일에 관하여, 기록하여 말한다.

이때, 예수,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고 갈릴리에서 요단()으로 오셨다.

요한,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할 자인데 당신이 도리어 내게 오십니까?

예수 대답하시기를 잠깐 허락하라. 이 같이 모든 의로운 일을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여기서 요한은 그에게 허락했다’(마태복음 3:13-15).

모든 의로운(옳은) 일을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순성의 예수께서 요한이 베푼 죄 사함의 침례를 받음은 선한(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받으셨던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선은 모두 의이다. 의로운 일이란 선한 일과 마찬가지이다).

 

첫째로, 요한은 혼자 천항에 향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소개했다.

예수는 이에 대하여 요한과 그의 침례를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이는 우의(友誼)가 명하는 바, 의이다. 선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걸고서, 요한의 전도에 보증하신 것이다.

예수는 최량의 친구(friend)였다. 그러므로 우의에 보답하는데 돈독하셨다.

 

요한은 그 예언자로서의 명예를 걸고서 목수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세상에 소개했다.

그의 이 용감한 행위에 대하여 보답하는바 어찌 없으랴?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걸고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아,

그와 그의 침례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의 지위가 손상될 것을 두려워하여,

선인줄 알면서도 공공연하게 서서 친구와 그의 사업을 증거하는 자는

아주 적음을 생각할 때,

예수의 이 행위의 아름다움이 추측되는 것이다.

 

뭇사람 사이에 숨어 은밀히 그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몰래 동정의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몸으로써 그의 교훈 지도를 받는다.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순결은 씻음의 필요 없다고 하면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우의에는 우의의 법칙이 있다.

의를 보고서 행치 않음은 용기가 없으시다.

예수는 이 경우에 자기를 잊고서 요한의 침례를 받으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의 이 행위에 의해 얼마나 힘을 얻게 되었을지!

예수 한 분의 증명을 받는 것은,

유대 전국의 승인을 받는 것보다도 힘 있게 느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사람을 그렇게 하여 서로를 도울 것이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자를 인정하고,

그 사업에 참가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선양을 도모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어떤가?

관중과 포숙은 마음으로 사귀었다. 빈천을 초월하여 서로 도왔는데,

이 일을 오늘의 사람은 모른 척만 한다고 두자미(1078역주)의 시는 말하는데,

예수와 요한과의 거룩한 교제(사귐)도 또한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는 버려 진개(塵芥)와 같이 하고 있지 않는가?

 

둘째로, 예수께서 요한이 주는 죄 사함의 침례를 받는 데는 달리도 이유가 있었다.

죄를 모르시는 예수께 회개의 침례를 받음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에 나타난 분이었다.

그러므로 그 자격으로서 요한의 침례를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 못하시는 (죄 없으신) 분을 우리 대신 죄인으로 하셨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되게 하려는 것이다’(고후 5:21)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는 이 경우에 있어서도 또한 죄인에 대신하여,

그들을 대표하여, 죄 사함의 침례를 받으신 것이다.

 

죽음의 필요 없으신 분이 죄인에 대신하여 죽으심 같이,

회개의 필요 없으신 이가 여기서 회개를 표시하신 것이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지대의 겸손이었다.

하지만 겸손은 그의 전 생애의 특징인 것으로서 이 경우에만 한 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침례는 그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전조였다.

그는 성전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스스로 택하여 죄인과 운명을 함께 하셨다.

예수의 침례의 의의와 그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의의 있는 침례, 이것을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또 하늘에서 소리 있었다. 이르시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기뻐한다(3:16-17참조).

 

이것은 사실 문자대로 있었던 일인지,

혹은 영적 실험을 물적 사실로서 기록한 것인지, 이것을 확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한 사실이었음은 확실하다.

여기서 용감한 신앙적 행위가 수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가상(approval)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일을 가상하게 여기시고, 성령에 의해 이자의 관계가 일층 밀접하게 된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란다.

 

지금까지 닫혀있던 하늘이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적 행위에 의해 급히 열리고,

마치 천막의 씌우개에 파열이 생겨 햇빛이 이것을 통하여 천막 안을 비춘 것과도 같았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성령, 비둘기 같이 내리셨다는 것이다.

고요히, 사뿐, 헐몬산의 이슬이 예루살렘에 내리듯 이때 성령이 예수 위에 내린 것이다.

성령의 강림이라고 하면, 오순절 날에 있어서와 같이,

 

하늘에서 세찬 바람 같은 소리 있는 불길 같은 것이 나타나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사도행전 2:2-3)고 생각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이것과 전혀 달라,

성령,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리심을 보셨다고 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은, 베드로에 의해 인용된

내가, 위로 하늘에 기적을 나타내고 아래 땅에 경조를 보일 것이다. 즉 피, , 연기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자 요엘의 말이 아니다(2:19참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아버지의 음성(소리)이었다.

 

성령의 강림이, 꼭 오순절 날의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님은,

예수의 이 경우에 있어서 보아 명백하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 우리들도 또 이 고요한 성령의 강림에 참여할 수 있을까 하건데,

그 길은 명료하다.

 

, 예수의 자취를 따라, 그가 행하신 대로 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즉 자기 지위와 명예를 걸고서 친구의 고귀한 사업에 참여하고,

또 타인의 죄를 자기 몸에 지고서 그를 대신하여 고난 받는데 의해,

우리들도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가상히 여김을 받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그의 상사에 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사람의 기구에 응답하여 주시는 최대의 선물이시다.

 

그리고 기도에,

말로서 하는 것과 행위로서 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말로서 하는 기도에 응답하는데,

오순절 날에 있어서와 같이 신풍열화 같은 성령의 강림이 있다면,

 

고귀한 행위로써 하는 기도에 응답하시는데

요단강가에 있어서와 같이 비둘기 같은 성령의 강림이 있는 것 아니랴?

 

나는 있다고 믿는다.

나의 짧은 신앙적 생애에 있어서도,

그러한 강림이 몇 번이고 내게 알맞게 있었다고 믿는다.

 

수치를 참고 약자위해 이바지하는 때에,

하나님의 사랑에 격려되어 조금의 은밀한 선을 행하는 때에

특히 자기는 별로 죄를 범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없는 때에,

혹은 타인 위해, 혹은 동포 위해, 혹은 조선의 유전 위해,

그들에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 때에,

그리고 고난 받으면서 불평않고, 나를 채찍질하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송찬하는 때에,

고요한 비둘기 같은 성령의 강림을 실험한 일이 있다고 믿는다.

 

이에 의해 보면, 사람은 침례식에 의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받은 정신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다.

 

침례식은 어떠해도 좋다.

그리스도 정신으로서 인생에 대하는 그것이 진정한 침례이다.

 

*내촌감삼의 길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