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거듭난 삶 2024. 3. 15.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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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시험

 

마가복음 112-13: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참조 : (마태복음 41-11절 누가복음 41-13)

 

다른 복음서에 비교하여 마가복음의 특징은

 

첫째로 순서적인 것,

둘째로, 간결하고 사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장 명백하게 들(광야)의 시험의 기사에 있어서 보인다.

예수는 침례를 요한에게서 받아, 새로이 성령과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 후 곧 그에게 임한 것이 광야의 시험이었다.

 

그리고 성령이, 곧 예수를 빈들로 가게 하셨다고 있는 대로이다.

 

능력이 가해지고 후에 시험(받으심),

그것이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순서였다.

 

모든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하다.

이 순서 그것이, 커다란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마가복음의 기사는 간결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충하는데 다른 복음서의 기사로써 함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기사는 누가복음의 기사와 그 요점에 있어서 일치한다.

 

다만 시험의 순서에 있어서 마태복음이 제2로 하는 것을

누가복음은 제3으로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서의 변화에 의해 시험의 의의에 다소의 변화를 낳는 것에 대해서는

후에 이르러 말하려 한다.

나는 여기서 3복음서의 기사를 종합하여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이 사건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세하게 생각해 보려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말한 것이 있다.

 

만약 시험 삼아 예수의 언행에 관계된 기사가 모두 소멸된다 해도

만약 황야의 시험의 기사가 남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남을 것이라고.

 

즉 광야의 시험, 이는 그리스도교라고 보아도 차지가 없는 것이다.

또 시인 밀튼(1120역주)

낙원의 회복 Paradise regained, 1671을 노래함에 있어서

그는 광야의 시험 이외에까지 미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도 또한 광야의 시험은 그리스도교의 전부였다.

예수는 이것으로서 세상에 이기고, 악마를 멸하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겸하여 말하는데 나의 아는 범위에 있어서

밀튼낙원의 회복, 광야의 시험에 관한 최대 최량의 주해이다.

그 글의 장고우미함은 말할 것 못되고,

그 신앙은 영국 청교도(234역주)의 신앙의 최고조에 달한 것으로서,

아마도 이 경우에 있어서의 예수의 심리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살핀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마가복음의 기사에 대하여 말하건대,

 

이란, 앞서 말한 대로이다.

성령이 예수를 (몰아)가게 하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좋아서 황야로 들어가신 것은 아니다.

성부의 영에 인도되어 타동적으로 가신 것이다.

외부의 압박을 말한 것인지,

또는 내심의 자극을 가리키는 것인지, 물론 알 수는 없다.

 

그가 이때 대 문제에 조우하여, 그 해결을 얻기 위해,

사람을 피하여 성부와 만 함께 있기를 구하신 것은 확실하다.

 

어떤 사람이 말한 일이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황야를 떠나서 생각할 것 아니다라고.

 

황야는 실로 이스라엘의 위인의 양성소였다.

모세도, 엘리야도, 아모스도, 침례 요한도,

기타 모두 친히 하나님과 사귄 자,

깊이 인생에 대해 생각한 자는,

황야에 이것을 찾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로 황야는

생산적으로는 무용의 땅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가장 유용한 역이다.

 

예루살렘에서 동남 수 마일에 이르고, 급경사를 이루어 사해로 내려가는 곳,

이것 이른 바 유다의 황야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 위해 예비하신 천연의 수도원이었다.

귀한 것은 불모(barreness), 무인의 땅인 황야이다.

 

성령, 예수를 황야로 몰아가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 또한 종종 예수의 제자를 황야로 몰아(인도해)간다.

혹은 대책임을 그에게 지게 하시며,

혹은 대사상을 그에게 주시고,

혹은 대의문을 그의 심령 내에 일으켜

그로 하여금 하는 수 없이 적막한 중에 광명을 찾게 하신다.

 

황야는 때로는 심산이다. 사막이다. 혹은 사람이 만든 수도원이다.

그리고 또 산으로 물러가지 않는대도, 그는 절에 은신치 않는대도,

마음 안에 황야가 만들어져 몸은 도회 잡답한 땅에 있대도,

영은 황야로 헤매며 악마에게 시험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는 누구이건 한번은 반드시 황야에 보내진다.

 

그때, 그는 어쩐지 불안하게 느낀다.

인생이 하찮아진다. 겁낸다. 떤다. 캄캄해진다.

그때, 여러 가지 속삭임이 마음의 귀에 들려온다.

실로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위기이다.

나는 위인의 전기를 읽고, 일이 여기에 이를 때,

그 장래에 대하여 커다란 의구(apprehension)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황야의 시험 그에게도 있었다고, 칼라일(983역주)

그의 의복철학 Sartor resartus, 1838에 있어서 말하고 있다.

 

워즈워드(1440역주)에게 있었던 것도,

그의 명작 서언 Prelude, 1850에 분명하다.

 

너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 나는 지금 메섹(5184역주)에 거한다.

나는 또 게달(5184역주)에 있다. 게달은 암흑의 뜻이라 한다.

 

그의 사촌 누이동생에게 써 보낸 크롬웰,

실로 이때 황야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각자 한번은 황야로 쫓아내는바 되는 것을 알아,

고독 적막을 느낀다고 해도, 결코 실망해서는 안 된다.

 

황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4040, 시내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도 또 여기서 40, 악마에게 시험받아 황야에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탄에게 시험받으셨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죄가 있음으로서만이 악마에게 시험받는 것이다.

예수가 시험 받으셨다고 있음은,

그도 역시 죄인이었던 증거가 아닌가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후에 대답하는 바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다만 히브리서 제415절 이하를 인용하는 것으로서 족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의 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대제사장이 아니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받으셨으나, 죄를 범치 않으셨다.

이러므로, 우리는 자비함을 받고, 때를 따라 알맞은 도움이 되는 은혜를 받기 위해,

담대히 은총의 보좌로 나아갈 것이다라고.

 

자신 죄 없으시나 죄의 사함의 침례를 받으신 예수는,

죄인에게 동정을 보내시려고 사탄에게 시험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시험받아,

시험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또 시험에 이기는 길을 보이셨다.

 

그는 어떻게 시험받으시고 어떻게 이기셨는지는, 다른 복음서가 보여주는 바이다.

나는 순서에 따라 그것을 설명하려고 생각한다.

 

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황야에 서식한 야수와 함께 계셨다고 하는 것일까?

만약 그러하다고 하면,

사자가 다니엘을 상해치 않은 것 같이 유다의 황야 특산의 사자나, , 전갈(Scorpion),

독사가 유화하신 거룩한 예수께 아무런 해도 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리라.

 

혹은 짐승이란, 사탄의 여러 가지 현화 아니었을지?

일은 종교심리학의 영분에 속하는 일로서,

단지 이것을 물리적으로만 설명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황야가 황야 아닐 경우에 있어서 짐승도 또 짐승이 아닌 것이다.

 

크롬웰처럼,

오래 지속되는 메섹의 땅에 암흑의 게달의 장막 내에 거하는 때에,

우리들은 짐승 같은 사람, 또는 짐승보다 악한 사람들과 함께 있도록

어찌하는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험의 고통은 황야에 있고, 또 황야의 짐승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조소하고, 욕하며, 거짓말로 각양의 약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허락 없이, 조금이라도 우리를 해칠 수는 없다.

 

황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고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

모두(전부)가 암흑이다. 모두가 처량(sad)하다.

 

하지만 천사들이 이에 시중들었다고 있다.

 

여기에 광명이 있다. 환희가 있다.

천사는 아름다운 형태로서 예수의 눈에 보였을지?

혹은 고요한 가는 음성으로서 그에게 속삭이는 것으로 들렸을지?

이것 또한 나의 아는 바 아니다.

하지만, 형태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문제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천사들을 보내어 지키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의 이 경우에 있어서 사실이다.

 

많은 성도의 경우에 있어서 사실이다.

크리스천에게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기편이 있다.

 

사탄이 그 천군을 인솔하여 가지고서 그를 공격하고,

사회에도, 교회에도, 또 그의 동지라고 일컫는 자 중에도,

한 사람의 동정자 없는 때에도,

천사들은 그를 지키고 신명(神命) 한번 내려 도우면, 그로 하여금 안전케 한다.

 

마가복음의 기사에 예수께서 어떻게 하여 사탄을 격퇴하셨는지, 그것은 써있지 않다.

 

하지만 천사가 그에게 시중들었다고 있어

우리들은 사탄의 시험은 전연 실패로 끝난 것을 아는 것이다.

 

기사는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대가의 붓으로 된 그림처럼 일점일획 모두 요점을 그려

진상이 목전에 약여(vivid)한 것을 본다.

 

천사들, 그에게 시중 들었다고 있다.

 

천사는, 때로는 영아이다.

그 미소에 천부의 사랑이 읽혀져,

우수(melancholy)의 악마가 흩어짐을 본다.

 

혹은 예언자 엘리야를 도운 가난한 과부 같은 이다.

그녀의 신앙에 회의의 구름은 걷혔다.

천사는 어디에도 있다.

 

*내촌감삼의 길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