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거듭난 삶 2024. 3. 2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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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기적

 

마가복음 135-4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참조 : (마태복음 81-4, 누가복음 442-43, 512-16)

 

예수의 목적은 선교에 있었다.

 

나는 가르침(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다’ (1:37)는 것은,

 

그가 자기의 천직에 대하여 깊이 자각하신 바였다.

 

그런데 그에게 차고 넘치는 능력이 있고, 누를 길 없는 동정 있는 까닭에,

은혜 거의는 치유의 기적이 선교에 수반했다.

 

하지만 예수에게 있어서는 가르침(말씀의 전파)이 주였고, 기적은 다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먼저 그 영혼을 구원되기 바라고,

그 육체가 고침받는 일은 그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여기서 예수와 사람들 사이에 요구의 충돌이 있었다.

 

백성은 가르침(말씀)을 받기보다도,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고,

영혼을 구원받기 보다도, 육체를 고침 받기를 원했다.

 

예수의 원하시는 바는 백성의 요구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실망의 그림자는 전도 개시의 제1에 이미 그의 마음을 흐리게 하셨다.

 

갈릴리의 봄은 일본의 봄처럼 극히 짧았다. 사흘 볼 수 없는 벚꽃이런가 이다.

갈릴리 호반의 하루는 실망으로써 끝났다.

 

새벽에 예수 일찍 일어나,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있다.

 

조기조기(朝祈)는 아마도 예수의 습관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경우에 특히 그 필요가 있었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능력의 소진 없이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옳다, 전도는 최대의 노력을 요한다. 이것은 자기를 남에게 주는 일이다.

단지 근육 또는 뇌수의 피로를 느끼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중심의 소모를 느낀다.

 

그리고 이것을 회복(치유)하고 또 채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기도는 기구가 아니다.

영에 접하여 내 공허를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가지고서 충만되는 일이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도 언제나 이 영의 재충실(refilling)의 필요가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사람에게 능력을 빼앗겨 이를 하나님께 채워 주심을 입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같이 하여 그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셨다.

그리고 시몬과 그 한 무리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사모해서가 아니다. ‘뒤를 따라서이다.

마치 경관(警官)이 범인의 뒤를 따르듯 열심히 해서이다.

 

예수가 그 모습을 감추신 후의 군집의 모양이 읽혀 진다.

그들은 예수를 잃고서 절망에 빠졌다.

제자들은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나 할 수 없어 여기서,

예수를 찾아내어 그들이 불온에 대비할 필요를 느꼈다.

 

(), ‘사람 모두 당신을 찾나이다라고.

 

복음을 듣고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을 통해 육체의 병을 치유받기 위해 그들은 혈안이 되어 예수를 찾은 것이다.

 

실로 위험한 일이란 신유의 은혜를 베푸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이것 때문에 전도의 목적은 전혀 오해되고, 사람들은 그 시행을 요구하여 마지않는다.

 

만약 그 요구에 응하지 못할 것인가, 그들이 원성과 분을 사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은혜의 기적을 베푸셨다.

 

그는 사람의 고생을 보고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은 강하여, 자기의 이해를 돌볼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베푼 은혜의 사업은 마침내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등지게 하고,

그 자신의 죽음을 빠르게(단축)한 원인으로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듯 아름다우신 것,

사람의 마음은 그렇듯 더러운 것이다.

 

예수는 그를 좆아온 시몬 등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다시 가버나움에 갈 필요가 없다.

가르침(말씀)을 전하기 위해 너희와 함께 부근 마을로 갈 것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온 것이다라고.

 

전도는 내 목적이다. 내게 치유의 기적을 요구하는 자에게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내가 가버나움을 나온 것은 이것 때문이다.

즉 그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서 육체의 평안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가련하다. 가버나움, 그들은 생명의 주님의 최초의 전도를 받으면서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고서 육체를 치유(고침) 받고자 했다.

 

주는 그들에 대하여 실망하셨다.

후에 이르러, 그로 하여금 그들에 대하여 비통의 말씀을 발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이미 하늘에까지 올려진 가버나움아, 또 음부(하데스)까지 떨어뜨려질 것이다. ’(마태복음 11:23)라고.

 

은혜를 만나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또한 위험이다. 조심할 것이다.

가버나움을 떠나, 고라신, 벳새다 등 부근의 마을 마을에 전도 하시는 동안에

나병환자의 한 사람,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원하여 말했다.

 

당신께서 만약 성의에 합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읍니다.

 

그는 꼭 고쳐주십시오하고는 말하지 않았다.

 

뜻이라면, 당신(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고칠 수 있다고 믿읍니다고 하여,

 

예수에 대한 그의 신앙을 나타냈다.

예수는 나병환자의 이 태도를 크게 기뻐하셨다.

동시에 또 그의 강한 연민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이전일 때문에 싫증 내지 않으시고, 여기서 또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다.

 

내 마음에 맞다. 깨끗해지라고 하시자마자, 곧 나병은 떠나고 그 사람은 깨끗해졌다고 있다.

 

고치기 아주 곤란한 나병이 하나님의 아들의 일언에 의해,

곧 완전하게 치유된 것이다.

 

예수, 엄히 경계하시고 그를 보내셨다고 있다.

모두 세찬 밀이다.

 

매섭게 쏘아 보시며 밀어내셨다고 역하면 얼마쯤 원어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리라.

 

예수는 어찌하여 자기가 치유한 사람에 대하여 그렇듯 격렬한 태도를 취하셨을까?

 

여기서 우리는 정다운 예수님을 보는 것 아니고,

거칠게 다루시는 단기의 선생을 보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사실은 덮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확실히 노하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자기의 사려 없음을 노하신 것이라고.

기쁨과 연민에 잡혀 치유(고침)의 기적을 행하셨다 해도,

그 결과가 자신의 사업에 결코 좋은 것이 아니심을 후에 이르러 깨달으셨다.

 

이 은혜는 베풀지 말았을 것을이라고, 그는 자신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지만, 능력은 이미 나가 병자는 치유되었다. 은혜는 이미 철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인자 몹시 거친 태도로써 치유된 자를 경계하시며,

 

이것을 누구에게도 고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절로 나은 것으로 하여, 구약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고,

바쳐야 할 것을 바쳐 꺼릴 병이 치유된 공인을 얻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후, 자기 손을 내밀어 회당에서 그를 밀어 내보냈다고 있다.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나 예수이신 분이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감사한다. 복음 기자는 대개의 그리스도 신자보다도 훨씬 정직한 것을,

그는 예수가 노하신 때에는 노하셨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정직한 기사에 의해, 우리는 예수의 심중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태어나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시에 또 사람의 아들이셨다.

 

그는 어떤 때는 과실에 빠지셨다.

하지만 죄의 사람이 빠지는 과실에 빠지지 않으셨다.

 

사람으로 인하여, 참다운 신앙을 만남의 기쁨으로 인하여 누를 수 없는 동정심에 잡혀,

후에 이르러 안 했다면 좋았었는데하는 선사를 행하셨다.

 

지나(1105역주)의 성인조차 사람의 과실을 보고 그 인을 안다고 했다.

 

예수의 빠지기 쉬운 허다한 선행의 과실,

그것은 예수의 인()일 뿐 아니라, 또 그 성()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근대인의 말로써 한다면,

 

도덕에도 정지적(static morality)인 것과 활동적(dynamic morality)인 것과의 이종이 있다.

 

이른바 도덕, 교회의 도덕, 목사, 전도사, 전도사가 말하는 도덕은, 대개는 전자 즉 정지적 도덕이다. 즉 신학자와 도덕가가 앉아서 생각하는 도덕이다. 즉 실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행해지지 않는 도덕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경우에 있어서의 행위 같은 것, 이것은 후자 즉 활동적 도덕으로 보아,

시기에 맞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노하신 이유는 사실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는 치유된 사람에게 침묵을 명하셨지만, 그 사람은 그 명에 따르지 않고,

 

그가 나가서 먼저 이 일을 크게 전하고 퍼치매, 예수 이후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고, 홀로 사람 없는 곳에 계셨는데,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에게로 왔다’(1:45).

 

이것 확실히 전도의 대방해이다.

 

치유된 사람은, 오늘의 많은 천박한 그리스도 신자가 하듯,

 

증거증거라 하여 자랑스러운 얼굴로 자기가 치유된 일을 크게 선전하고, 퍼뜨렸을 것이리라.

 

그러나 예수는 이것을 싫어하신다.

그의 복음은 복음으로서, 즉 하나님의 진리로서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 기적이 따르는 일 있대도,

이것은 단지 신자의 신앙을 굳세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불신자에게 신앙을 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침묵을 명하신 경우에 우리는 이것을 공언해서는 안 된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