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거듭난 삶 2024. 3. 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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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마태의 성소(聖召)

 

마가복음 213-17: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참조 : (마태복음 99-13, 누가복음 527-32)

 

인류의 신앙적 혁명이 호숫가에서 시작한 예는 둘 있다.

 

그 하나는 물론 갈릴리 호반에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발상이고,

그 제2, 스위스국 제네바 호반에 있어서의 칼빈주의의 발상이다.

 

먼저 제2의 것에 대해서 말 하건데, 제네바호는 갈릴리호에 비교하여,

그 넓이에 있어서도, 깊이에 있어서도, 또 풍경의 명미(picturesque fine)에 있어서도,

훨씬 승한 호수이다.

 

그리고 그 호수 끝에 세워진 제네바에 존 칼빈(깔벵- 11302역주)이 온데서 부터,

이에 갈릴리 호반에 있어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근세기에 초기에 있어서 부흥하여 그 생명의 물은 흘러 홀란드에 미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마침내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프로테스탄트교의 대 세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이후의 세계 역사는 제네바호와 칼빈주의를 떠나서 논할 수는 없다.

 

죤 녹스는 여기서 칼빈에게서 순복음을 받고, 그는 이것을 가지고서 고국 스코틀랜드에 돌아가, 그 백성 사이에 이를 심으니, 좋은 씨는 좋은 땅에 심겨져, 60배 백배의 열매를 맺고,

이제는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기타, 영국 민족이 이르는 곳 도처에, 칼빈주의의 융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제네바호에 비하여 갈릴리호는 퍽 못한 호수이다.

하지만 그 부근에 시작된 세계 운동은 그 결과야말로, 영구적이며 또 우주적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이 작은 호수에서 어업에 종사한 어부의 이름이다.

베드로와 요한, 그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 그들은 갈릴리호수의 어부였다.

 

그들은 예수께 부르심을 받아 그 제자로 되고, 복음의 선전이 맡겨졌기 때문에 인류의 교사, 세계의 모범으로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의 박해자로서 유명한 로마의 대제 율리아누스는 죽음에 임하여 외쳤다는 것이다.

 

갈릴리 사람아, 그대, 내게 이겼다.

 

실로 세계는 갈릴리 사람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정복되고 있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그 길이 13마일(21km-편자), 넓이는 8마일(13km), 깊이는 150-(46m -편자)를 넘지 못하고, 호수로서는 극히 작은 것의 하나라도, 그 세계적 감화력이란 실로 무류절륜이다.

 

그리고 갈릴리 호반은 다시 또 한 사람의 세계적 인물을 공헌했다.

그 사람은 마태라 불린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그는 몸은 유대인이면서, 적국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자기 나라 사람에게서 세를 징수하는 업에 종사하는 자였다.

나라를 팔고 백성을 팔며 신앙을 팔면서도 부끄러워 않는 가장 비열한 자의 무리에 들어간 자이다. 그러므로 당시 비천한 자라고 하면, ‘세리와 창기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앞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1:31 참조).

 

그런데 예수는 이 세리 중에서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을 택하고, 후에 그를 들어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하셨던 것이다.

 

대담하다고 하면 대담, 색다른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색다른 것 좋아하는 이다.

 

하필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라고, 사람들은 예수의 이 행위를 평했으리라.

 

특히 어부를 택하여 그 제자로 삼은 것 마저 수상한데, 다시 세리를 불러 수행인의 한 사람으로 하기에 이르러서는, 이상인가 기괴인가, 다만 놀라는 외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굳이 이 일을 하신 것이다.

그가, 호반을 걸어가시는데, 레위(마태)라는 사람이 세리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따르니라고 있다.

 

여기서 확실히 세리는 바리새의 학자들에 앞서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가리시지 않는 분이시다’ (사도행전 10:34).

 

하나님은 얼굴에 의해 사람을 보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다르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여호와는 마음을 보신다’ (사무엘상 16:7)고 있다.

 

사람의 직업 무어랴? 그 외모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 계급, 이것 역시 육의 일로서 외모의 것이다.

 

사람이 사람 된 가치는 그 마음 즉 영혼에 있다.

 

사람이 본 마태는 세리로서, 가장 비천한 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보신 마태는, 아브라함의 후예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맡기기에 적합한 그릇이었다.

 

세리라고 해서 이 귀한 그릇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어 이 비천한 자를 자기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받은 마태의 기쁨은 비상했다.

 

그는 여기서 생후 처음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만난 것이다.

그는 원래 사람이 보는 것처럼 비열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경우에 강요되어 하는 수 없이 로마 정부의 관리로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참된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구속되는 일은 그의 충심의 기원이었다.

그는 남모르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그를 불러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여기서 대교사 예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불러,

 

나를 따라 오라시는 것을 들었다.

 

그의 기쁨에 가히 비교할 것이 없었다.

그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이 기록하는 대로 그는 일체의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를 따랐다.

여기에 부르신 예수의 위대하심에 아울러, 부르심을 받은 마태의 귀함이 읽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태는 후에 무엇을 하였던가?

그것에 대해서는 성서에 아무 기록하는 바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이 12사도의 명부록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 1복음서가 그의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진 까닭에,

그는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가량, 이른 바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의 붓으로 된 글()이 아니라 한대도,

그에게 어떤 밀접한 관계있는 글임은 분명하다.

 

마태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는, 마태복음에 의해 거의 알 수가 있다.

 

마태복음은, 모든 점에서 관찰하여 그리스도교가 낳은 가장 소중한 글()이다.

이때까지 이것 이상의 글이 세상에 나온 일이 없다는 것은, 르낭(910역주)의 비평이다.

 

그러한 글에 그 이름을 붙인 마태의 성격은 미루어 알 것이다.

 

그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특히 예수의 교훈에 뜻을 쏟은 사람이었다.

예수를 유대인이 대망한 메시아로 보았다. 또 그에게 인류의 왕의 권능을 인정했다.

 

마태는 아무것도 안했대도 마태복음을 세상에 낸 원동력 또는 사료의 공급자된 것만으로, 영구적 대사업을 했다.

 

세리 마태에 의하지 않고서 마태복음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을 알고서, 예수는 그를 불러 갈릴리 호반의 모래 가운데서 값진 귀한 하나의 진주를 발견한 것을 아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께 알려지고 그에게 부르심을 받은 후는 세리의 직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일체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뿐만 아니다, 그는 공개(公開)로 그의 세리 폐업의 선언을 했다.

즉 유별의 연석을 마련하여, 구우(舊友) 동료를 이에 초대하고,

여기에 예수의 출석을 청하여, 그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자신의 개신(改信)을 고백함과 함께 그들을 위해 전도의 길을 열었다.

실로 사랑할 만한 건아(健兒)다운 행위이다.

 

신앙은 마음의 일이라고 칭하여, 이것을 세상에 고백치 않는 것은,

성실한 사람이 옳게 여기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마태는 연석을 마련하여 작별을 세상에 알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는 불도가 출가하는 때 처럼 눈물로서 세상과 작별하지 않았다.

신부가 신랑의 집에 가는 때 처럼 하연을 베풀어 신생(新生)애에 들어갔다.

 

레위(마태)가 자기 집에서 예수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누가복음 5:29)고 있다.

 

마태는 대연회(大宴會)를 열어, 세상을 떠나 예수에게 속했던 것이다.

통쾌 이상 없는 일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