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거듭난 삶 2024. 3. 23. 00:03
728x90

사죄(赦罪)와 치유

 

마가복음 21-12: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참조 : (마태복음 91-8절 누가복음 517-26)

 

예수 일단 가버나움을 떠나, 부근의 마을 마을에 전도하시다가 다시 배로 이전 동네로 돌아오셨다.

베드로의 집을 자기 집으로 정하여 거기 계셨다.

 

그것이 동네에 알려지자,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문 안팎에 설 곳마저 없을 정도로 모였다.

 

예수는 그들에게 가르침(말씀)을 펴셨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가 이르는 곳에서 먼저 제1로 하신 것은 이것이었다.

 

때에 사람들이, 중풍을 앓는 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고침 받기 위해 예수께로 왔다.

그런데 군집 때문에 가까이하기 어려워, 그가 계신 집의 지붕을 헐고, 중풍환자를 상채로 달아내려 예수 앞에 두었다.

즉 어떠한 비상 수단을 취해서라도 고침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보였다.

 

예수, 그들의 신앙을 보고, 환자에게 향하여 말했다.

 

내 아들아, 네 죄 사해졌다.

 

그는 앞 서의 나병환자의 경우와 같이, 연민에 움직인바 되어 큰 병을 고치지 않으셨다.

 

네 죄 사해졌다고 하셨다.

 

병을 고치기 전에 죄의 사유를 선고하셨다.

그가 얼마나 이 병자를 사랑하셨는지 알 수가 있다.

 

내 아들아(소자여), 네 죄 사해졌다.

 

만약 이 병인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었다면, 그는 이것으로 만족했으리라.

 

죄를 사함 받는 것은 병을 고침 받는 이상의 은혜이다.

그것도 다만 믿는 것에 의해 사해졌다고 한다.

복음의 근본이 여기에 보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수인(數人)의 학자, 즉 직업적 종교가가 앉아 이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리새파의 사람으로서 갈릴리의 마을, 유대, 예루살렘에서 온 자라고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5: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들은 예수에게 배우고자 하여 온 것은 아니다.

그의 흠점을 찾아내고, 과실을 잡아, 백성의 마음을 그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온 것이다.

 

()을 종교에 잡은 자로 이 혐기(hate)할 마음이 있는 것은, 고금동서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중풍환자에 대한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 사람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무슨 일이나 선의로 해석하지 않고서, 악의로 해석하는 이들 종교가는 예수의 이 말씀에 설독(profanity)의 죄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발견을 하고서, 그들은 뜻하는 대로 되었다고 마음속으로 말했으리라.

 

나사렛의 예수 누구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도 또한 성자가 아니라고 알아 그들은 크게 안심했으리라.

 

그런데 예수는 곧 그들의 심중을 간파하시었다.

이제는 그들과 의론해도 무익하다.

다만 사실로써 그의 말씀이 빈말이 아님을 그들에게 보일 뿐이다.

 

중풍의 사람에게 향하여

 

네 죄 사해졌다,

 

그들이라 해도 말할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가라고는,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받는 자 아니면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의 소위 종교가와 달라 말의 사람이 아니라 권위의 사람인 것을 그들에게 보이시기 위해,

 

즉 그이, 인자는 하나님에 대신하여 땅에서 죄를 사함의 권위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마침내 중풍환자에게 향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 상을 가지고 네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 소리에 따라 그는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뭇사람의 앞을 지나 나갔다.

이것을 본 군중은 모두 놀랐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했다.

 

우리는 이때까지 이런 일을 보지 못했다.

 

치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즉시적이고, 또 완전했다.

환자는 곧 완전히 치유되어 기뻐 뛰며 집으로 돌아갔다.

실로 하나님께 어울리는 치유의 역사였다.

 

여기에 많은 중요한 일이 교시된다.

 

제일로, 병은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적어도 이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근본적으로 병을 치유 받고자 하면 먼저 죄를 사함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죄를 사함 받는 때에 병의 근본이 근절된 것으로, 그것이 언젠가 반드시 치유될 것은 이미 의심이 없는 것이다.

 

여호와는 네 모든 병을 고치시는 도다’(시편 103;3)고 있는 대로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가령 병의 치유를 보지 못한대도, 죄의 사유를 실험한 것 만으로, 그리스도 신자는 욥처럼, 치유를 미래의 희망으로 두고서, 병에 견디며, 죽음에 임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예수께 죄를 사함이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최대의 종교가, 최고의 도덕의 교사는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 의해, 의에 의해 사람의 죄를 사함의 길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또 그에게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권능을 주셨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이분 외에 달리 구원 없다. 그것은 천하의 사람 중에,

우리들이 의지하여 구원될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사도행전 4:12)이다.

 

일은 양심에 관계된 문제이다.

이론은 별도로 하고, 사람은 이때까지 예수에 의하지 않고서 내 죄는 확실히 사함받았다는 확신과, 이에 따르는 기쁨을 얻는 일은 없다.

우리들이 로마서 325절의 연구에 있어서 배운 대로이다.

 

(로마서 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 죄의 사유(사죄)와 이에 따르는 모든 은혜는 신앙에 의한다는 것이다.

 

신앙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은 바울이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예수가 가르치시고, 또 행하신 것이다. 신앙에도 물론 정도가 있다.

 

만약 하고자 뜻하신다면 당신은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 나병환자의 신앙도 신앙이었다.

 

다만 한 말씀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종은 나을 것입니다한 백부장의 신앙도 신앙이었다.

 

어쨌거나, 신앙은 신앙인 것으로서,

신앙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히브리서 11:6)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신앙에 의한다.

지식에 의하지 않는다.

학구에 의하지 않고, 또 이른바 도덕 윤리에 의하지 않고, 신앙에 의한다.

 

하나님 계심을 믿고, 또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서

하나님께 온 자에게 사유(사죄), 치유(고침), 기타 모든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만약 학문의 비결이 고증이라면, 종교의 비결은 신앙이다.

의지(의뢰)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 있어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우주를 움직일 수가 있다.

종교에 있어서는 신앙 제일이다.

 

그리고 신앙은 반드시 자기의 신앙이 아니라도 좋다.

타인의 신앙도 또한 나를 돕는 것이다.

 

중풍환자를 4인에게 들려 예수께로 온 사람들(아마도 그 친척이었으리라)의 신앙에 마음이 움직여 그는 그 병자를 고쳐 주셨다.

백부장의 신앙에 마음이 움직여 그 종을 고쳐 주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에 감격하여, 그 딸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자기의 신앙으로서 타인을 도울 수가 있다.

 

또 남에게 청하여, 그 신앙으로서 자기를 도와 달랄 수가 있다.

어찌하여 그런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서 서로 관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개인주의를 인정하시지 않는다. 실로 고마우신 일이다.

 

믿는 자와 상대하여, 의심하는 자가 있다.

바리새파의 학자들은 예수의 흠 점을 찾으려고 멀리 유대, 예루살렘 땅에서 왔다.

그들은 병자가 치유되었다고 해서 기뻐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하여 그를 비난했다.

 

그들은 후에 안식일을 범했다 하여, 또 죄 있는 자와 함께 먹었다고 하여, 예수를 비난했다.

그들은 전연 소극적 인물이었다.

선한(좋은)것은 보이지 않고, 나쁜 것에만 주의가 갔다.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로써

 

나는 자비를 기뻐하고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들 학자들은 그 반대로 제사의 사소한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의와 사랑과 믿음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예수와 그들과의 사이에 천지운니의 차가 있었다.

이자의 분리 충돌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했다.

 

자비냐, 제사냐, 신앙이냐, 신학이냐,

이자의 상위는 근본적인 것이어서, 도저히 조화될 것이 아니었다.

 

예수와 병인(病因)과 종교가,

치유할 수 있는 자와, 치유되기를 바라는 자와, 의심의 눈으로서 방관하는 자와

이 셋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 전도사, 신학자들.

 

종교를 본직으로 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위험은, 이상 제3자의 지위에 서는 일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고,

회의는 하나님을 적으로 가지는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은 마르고, 뜨거운 신앙은 없어지고,

 

다만 차고 날카로운 비평의 눈만 남아, 사람은 바리새인으로 되어 예수를 적으로 가지고,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달기에 이르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